3분QT-여호수아편 2009. 11. 27. 13:49

3. 한 걸음 앞서가는 곳에 미래가 있습니다.

제목: 이제 너는 일어나 가라.

말씀: 여호수아 1장 2절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1:2)


1. 묵상할 말씀

이제 너는... 일어나...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의지는 어쩌면 단호함인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대해 더 이상 연연하거나 안주 하지 말고 분명한 태도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2. 깨달음과 교훈
첫째는 과거에 발목 잡혀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했습니다.(빌3:13)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둘째는 한 걸은 앞서가는 곳에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만 한 걸은 앞서가는 곳에 미래는 열리고 있었습니다.

3. 삶에의 적용
과거의 상처에 묶여서 한 치 앞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반면 항상 미래를 향하여 먼저 일어나 한 걸음 앞서 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떤 편에 속한 사람인가? 스스로 물어 보았습니다.

과거,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국의 영락 교회의 뒤뜰에서 만난 권사님 한 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키가 작았고 걸음 거리는 뒤뚱거렸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밝은 미소 띤 권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이 제 옆에 다가와 앉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젊은이 이름 나한테 알려 줄 수 있어?”
“왜요?”
저는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이제 내 나이 80이 훨씬 넘었는데 다리가 떨려 전도도 못하고 침이 말라 말하기도 힘이 들어 그런데 주님께서 아직 나를 데려가지 않는 한 가지 이유가 있어. 그것은 미래의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지. 가만 보니 젊은이도 주의 종이라고 주님이 일러 주셔서 기도 해 주려고 해. 그러니 이름 알려 주겠어?”

권사님의 이야기는 북한에서 홀로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보따리 장사하며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평생에 사명으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평생 한 교회에서 사명으로 교회를 세웠고 성도를 봉사 했고 두 자식을 사명으로 키워서 하나는 육군 장성, 하나는 대학 교수로 키웠다고 합니다.
이제 남은 사명은 미래의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주님께서 부르는 날 내 본향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렇게 승리하는 삶을 살았는가?”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말합니다.
“응 그저 한 걸음 앞서 갔을 뿐이야 항상 주님은 한 걸음 앞서서 나를 불러 주셨거든.” 저는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앞서가면서 사명으로 산 영적 거인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밝은 얼굴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일어나 가야할 터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앞서 가게 하는 터전 바로 그 곳이 나의 미래이고 거기에 주님이 나를 불렀습니다.

예수님!
저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이제 과거의 것을  단호히 끊어 버리고 날마다, 아침마다 한 걸음 앞서서 불러 주시는 그곳을 향하 가고자 합니다.
내게 주기로 작정하신 그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리게 하여 주세요.
이제 아침마다. 한 걸음 앞서서 일어나 가겠습니다. 아멘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4)

3분QT-여호수아편 2009. 11. 25. 12:52

2. 종의 삶이 먼저입니다.

제목: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수1:1)

1. 묵상할 말씀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부를 때 모세의 시종이란 명칭을 앞서서 부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눅22:27)
종의 삶이 먼저였습니다.

2. 깨달음과 교훈
첫째는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계승자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필요에 따라 순종해 주었고 필요따라 잘 섬겨 주었습니다.  
둘째는 종의 삶을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높여 주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불러 마침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3. 삶에의 적용
항상 지저분한 방과 책상을 보면서도 손 하나 까닥 안하고 그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차려준 밥 먹으면서 잘난 척하고 불평 투정하는 내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아! 이런 생활이 문제가 되는 구나 지적을 받았습니다.
먼저 종이 되어주고 먼저 섬겨주고 먼저 대접해 주는 종의 삶이 내 안에 없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D L 무디가 수련회를 인도할 때 신학생들이 숙소 안에 들어가면서 벗어논 신발이 엉망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 날 밤 아무도 모르게 신발을 깨끗하게 닦아 주고 신발장에 잘 정리하여 넣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신학생들은 무디 목사님의 섬기는 삶의 모습을 통해
더욱 존경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의 집에 오면 제일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신발입니다.
현관 문 앞에 신발이 쌓여 있습니다. 또 다른 신발을 신게 되면 다른 신발은 치우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신발이 계속 수북이 쌓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적하며 잔소리만 했지 제 자신이 먼저 종같이 섬겨 주지를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신발을 잘 정리 할 때까지 묵묵히 섬겨주는 자로 그들 중에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저도 여호수아 같이 시종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잘난 척하는 것이 있고 교만이 있고 자존심은 강하고
섬기는 체질이 없음을 알기에 저는 십자가 날마다 죽이고 주님의 인품이 내 안에 살아나기를 진짜로 원합니다. 아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7)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백동흠 칼럼 2009. 11. 22. 10:24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 맺는 열매입니다. 

                                                        백 동흠목사

나의 집에 전기가 들어 온다면
이 지구상에 전기 혜택을 입지 못하는 사람 20억명의 사람보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 맑고 깨끗한 수도물이 들어 온다면
10억의 사람보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한끼의  따끗한 밥을 온 식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8억명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보다 더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주의 교회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체포와 학대와 죽음의 공포속에 있는 30억명의 사람보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 안에 먹을 음식이 있고 따뜻한 옷으로 몸을 걸 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75%의 사람보다 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일고 내가 축복 받은 존재인것을 안다면은
이 세상에 글을 읽지 못하는 20억명의 사람보다 더 많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2006년도에 영국의 생크 탱크인 신 경제 재단(NEF)에서 나라별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미국의 150위, 영국이 108위, 일본이 98위로 나왔습니다.
한국도 행복지수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102위입니다.

그러면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남태평양 호주 근방의 섬나라 비누아투라는 20만명이 사는 아주 작은 나라었습니다.

지난 5월에 한국에 그 나라 관광청장이 방문했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 어떻게 그 나라 국민은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 바누아투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지요. 그리고 항상 서로를 나누어 주고 존중히 여겨주는 생활에
익숙할 뿐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는  바닷물 같이 마실 수록 갈증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우리의 행복을 좀먹는 벌레와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미래의 번영을 키우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의 절기에 진정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으면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내일을 참 좋은 날 주일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며 "큰 감사 간증의 날"로
전 성도 간증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세요 환영합니다.

3분QT-여호수아편 2009. 11. 21. 06:29

1. 내 인생의 무대는 잠시입니다.

1. 모세의 죽은 후에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요?
본 매일 QT는 간단하면서도 삶에의 적용을 위해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짧은 3분의 묵상으로 영의 양식과 삶의 적용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여호수아1장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 묵상할 말씀
“모세의 죽은 후에…….”
모세의 무대는 광야의 터전이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무대인 광야는 과거가 되어 지고 있고 가나안의 무대가 열리는 시점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는 광야의 무대와 함께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이제 모세는 과거의 사람이 됐고 그의 광야의 무대로 막을 내려지는 시점이
오늘 본문 여호수아 1장 1절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2. 깨달음과 교훈
첫째는 나의 때 나의 무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에게 모세의 무대가 있듯이...
둘째는 내 인생의 무대로 아주 잠시 후면 그 막이 내려 질 수 있음을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내려질 나의 무대를 앞에 두고 깊은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3. 삶에의 적용
정말 나는 잠시 후면 무대의 막이 내려질 나의 인생의 무대에서 얼마나 나의 주어진 삶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전혀 생각 없이 살아 왔던 나의 하루의 생활이 왜 이리 허점이 많고 생활이 무질서 한지 그리고 왜 이리 쫓길 것 없이 쫓기며 살았는지 주님앞에 고백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풍으로 쓰러진 후 약 4년간을 고생하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천국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데리고 가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경험을 한 후 약 1주일간은 얼굴이 밝고 목소리가 또리방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종 빨리 내 본향집에 가고 싶다고 입으로 속삭이듯 말씀하시더니 굳은 표정으로 계시다가 그렇게 돌아 가셨습니다.
처음 쓰려지신후 정신이 돌아 오신다음 제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동흠아 이제 나의 무대는 끝났단다. 이제 너의 무대가 열리고 있구나 잘해야 돼. 알았지?"
그런데 벌써 나의 자녀가 이만큼 커서 다가 옴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정말 빠른 세월 이제 곧 나의 무대를 비켜 주어야 할 텐데 너무나 허전해서 어떻하나?
생각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주님!
모세의 죽은 후에를 보면서 정말 저도 잠시 후면 떠나가야 하는 것이
나의 인생의 무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 볼 때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주어진 삶의 무대에서 보람과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주님 꼭 힘 되어 주세요. 아멘”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5:15-16)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
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백동흠 칼럼 2009. 11. 18. 04:11

감사는 미래의 번영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사는 미래의 번영이 자라게 합니다.

                                                          백 동 흠목사


1. 청교도들의 역사

청교도라는 언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564년 경 교회의 강력한 힘을 가진
영국의 주교들이 그들의 관구 승려들에게 영국교회의 기도서와 예배의식, 승려예복
등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이에 대한 거부한 무리들을 청교도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란 제 1차적으로 영국교회(앵그리칸이즘)을 배격하고 더 나아가서 카톨릭을
배격하려한 16~17세기 영국의 신교도 일반인들을 칭하여 청교도라고 했습니다.

청교주의가 내세우는 종교의 보편적 진리는 형식보다는 내면을 강조하는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종교의식의 절차를 화려하게 꾸며놓고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따르는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믿었습니다. 결국 박해를 받은 이들 청교도들중에 몇 사람(146명)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1620년 신대륙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2. 청교도들과 추수 감사절의 유래
1620년 180톤의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시속 2마일의 속도로 117일간의 운항속에 신대륙 플리머스 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날이 12월 26일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
향토병으로 죽은 사람이 44명이나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극에 달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믿음으로 그해 겨울을 이겨냈습니다.
그 해 봄 가져온 밀과 보리의 씨앗을 심었으나 실패했을 때 그 지역 인디안의
도움으로 옥수수, 감자, 호박, 햇곡식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인디언들을 초대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감사절을 지킨 것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된것입니다.

이때 이들이 감사한 것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이곳에 올 수 있는 작은 범선이나마 주신 것을 감사
둘째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맞아 큰 돗이 부러 졌고 몇 자매님이 심한 파도에 휩쓸렸으나 무사히 구출된 것을 감사
셋째 항해 기간 중 두 명이 죽었으나 새 생명 새 아기가 태어남을 감사
넷째 117일간 3개 월동안 고통이 심했으나 결코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음에 감사
다섯째 첫 겨울 비록 몇 분이 죽었으나 죽음의 겨울을 이긴 것에 대한 감사
여섯째 좋은 원주민 친구들을 만나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3. 감사절의 시작
그 후 3년 후 메사추세츠의 주지사 월리엄 브래드퍼드는 감사절을 제정하여
선포합니다.
“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선포합니다.
주후1623년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온 가족이 다함께 교회에
모여 예배하며 이 모든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선포 합니다.”

그후 각 주마다 추수 감사절을 지내오다가 링컨이 대통령 된 후 마침내 국경일로
제정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의 경건한 조상, 청교도들이 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신앙의 유산을
우리의 후손들이 잘 계승하도록 이 날을 국가 축제의 날로 선포합니다.”

그 후 역대의 대통령들은 이 날에 온 백성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메세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들이 그 땅에 첫 발을 디딘 후 세운 첫 번째 것이 하나님의 교회 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격이 되었을 까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많은 형제와 자매가
고통 속에 죽어야 했고 이 낮선 땅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향한 신앙과 예배의 정신! 이 한가지 이유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드린 예배의 감격은 켰으며 그들의 드린 감사의 예물을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기초는 이런 믿음과 감사의 예물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믿음과 감사의 뿌리가 미래의 이 땅을 번성하게 한 정신사의 흐름인 것을 후손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한 개인의 미래를 번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미래를 번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한 나라도 미래의 번영을 불러오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
올해 부터 정말 감격스런 감사의 예배가 이번 추수 감사 주일부터
드려지게 되기를 기대해 보고 싶답니다. 아멘이지요?

행복한 가정만들기 2009. 11. 12. 09:33

말 한마디가 보약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신의 언어 환경은 어떤지요?

한 부부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넓은 바다를 보니 마음이 확 트이고 연애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넓은 모래사장에서 부부는 서로 업어 주자고 했습니다.
먼저 남편이 아내를 업자 아내가 감격하고 미안해서 "여보, 나 너무 무겁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머리는 돌이고, 심장은 철로 된 강심장이고,
몸은 요크셔니까 당연히 무겁지!"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 말에 아내가 삐쳐서 남편을 업어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그래도 업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할 수 없이 업어주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미안해서 "여보, 나 가볍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머리는 비었고, 입은 가볍고, 손까지 빈손이니 당연히 가볍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남편의 얼굴은 굳어지면서 창백해 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내는
“자기가 그렇게 말해서 나도 농담으로 그렇게 한 건데...” 그러나 이때는 늦었습니다. 즐겁게 떠난 여행이 차갑게 식어져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한달 이상이나 갔습니다.

부부싸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결론은 "100% 일방적인 잘못은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 죄와 허물도 있지만 내 죄와 허물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허물은 말에 대한 덕목의 부족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입술을 잘 지킬 때 그의 사랑과 인간관계도 잘 지켜집니다.

우리 한국의 부부는 사랑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언어가 받쳐 주지를 못하고 있답니다.
자꾸 훈련 삼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에 달달 외워지게 해야 합니다.
“사랑해, 훌륭해, 당신은 정말 좋아, 정말 당신이 있어 난 행복해..”

보약이 필요 없습니다. 나의 따뜻하고 배려해 주며 인정해 주는 말 한마디가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식에게까지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게 됩니다.

스스로 물어 보기 바랍니다. 나의 언어환경은 어떠한가를....

행복한 가정만들기 2009. 11. 4. 20:11

행복은 물같이 낮은 자리에 고입니다.



                내 탓으로 돌리세요. 그럼 행복해 집니다.

                                                                    백 동흠 목사

어느 마을에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집은 참 삭막했고 썰렁했으며 가정의 식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겉돌았습니다.
사랑이 식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데 부모끼리 또한 자녀들끼리 자주
다투고 싸우고 했습니다.
또 한집은 가정의 분위기가 따뜻했으며 가족 상호간에 서로 위로와 격려가
넘쳐 습니다.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피부 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결코 가정 안에 큰소리 지르는 것도 없고 다투거나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 우리의 가정은 전자의 가정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후자의 가정의 모습인가요?

하루는 늘 다투며 싸우는 가정의 사람이 그렇지 않은 가정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네 가정은 그리 부요하지도 않은데 어찌 그렇게 화목하고 행복하게
사는가? 좀 나에게 평화의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평화로운 가정에 사는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우리 집은 나쁜 사람만 모여 살기 때문이지요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의아해 하며 이해를 못하는 것이 였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사람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어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물 컵이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발로 걷어차서 엎질렀지요.
내가 부주의해서 "물을 엎질렀노라"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의 하는 말이 "물 컵을 거기 둔 자기가 나빴노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옆에 계신 우리 어머님께 "아니다 애들아 내가 보고 치웠어야 하는데 치우지
못 한 내가 나빴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막내 놈이 "아빠 사실 은 물을 달래서 마시고 아무렇게나 둔 제가 나빴어요." 라고 말하더군요.
이 조그마한 일에도 서로가 잘못했다고 내가 나빴노라고 서로가 먼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싸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라고 생각이 드시는지요?
똑똑한 사람,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로만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조금 져 줄줄 알고 조금 빈틈도 보여 주고 그저 내 탓으로 돌리고
난 부족한데 당신 덕에 내가 산다고 상대방을 높여 주는 사람이 있는 가정은
행복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차라리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고전1:27,28)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 마음을 비웠으면 합니다. 행복은 물같이 낮은 자리로 고이게 되여 있습니다.
우리의 어설픈 똑똑함이 얼마나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가는지 모릅니다.
조금 손해 볼 것 같아도 나를 비어 놓으면 주님은 참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답니다.
한번 해 보세요. 곧 체험케 될 것입니다.  샬롬 ♬


계시록 강해 2009. 11. 4. 04:49

계시록4장 강해 ②

본 강해는 그라나다힐 한인교회 백동흠목사의  새벽 강단의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4장 강해  제2강
보좌에 둘러선 모습들
(계시록4장 4-6)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다음 사도 요한이 보좌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경을 보았습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24장로의 보좌가 있고 그 앞에 등불 일곱이 있고 그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보좌주위에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보좌에 둘러선 이들의 모습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이십사 보좌의 이십사 장로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

첫째 이십사 장로는 누구일까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장로의 보좌와 교회시대의 12사도의 보좌를 뜻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1장에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도 12 지파의 이름이 새겨 졌고(12)
그 성곽의 열두 기초 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새겨 져 있습니다.(14) 이십사 장로는 대표성을 띤 분으로 이 분들 이름 안에 이스라엘 민족안에 있는 성도와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들은 생명책에도 기록된 이름입니다.(20:12,15)

둘째 이십사 장로들의 모습은?
① 흰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흰옷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계19:8) 이 옳은 행실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얻어진 칭의와
함께 변화되어 성령으로 나타나는 행실들(성화)이 천국에서 세마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②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야1:12), 영광의 면류관(벧전5:4))외에 여러가지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주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우리도 훗날 금 면류관을 쓰고 그 이십사 장로와 함께 그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2.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영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계4:5)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와 직접 연결하여 우리 교회와 늘 함께 계셨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열두 사도의 보좌안에 들어가 앉게 될 것입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도 보좌와 함께 거기 계심을 보게 됩니다.
일곱 영은 일곱 교회와 함께 계신 성령님을 뜻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곁에 계셔 보혜사로 도우시고 계십니다.(요14:16)
그리고 이제 때가 되면 우리를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휴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열두 사도의 보좌에 앉게 될 때 성령님도 거기 함께 계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장차의 영광은 지금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 될 수 없다고 한 것도 그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은 모습을 보고 와서 말한 고백입니다.

3. 수정 바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계4:6)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수정 바다는 너무나 잔잔하고 맑고 평화롭고 아름답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유리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정 바다가 단순이 아름다운 풍경을 주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22장 1절에는 그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보좌로 부터 흘러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수정 바다를 이루고 있고 이것이 각 지역으로 생수의 강이 되여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변에는 생명 나무가 과실을 달마다 맺고 있고 그 잎사귀는 치료가 되는 신비한 명약이 되기도 합니다.
이 환상을 에스켈도 보았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 마다 만물이 소생하는 현상을 보았습니다.(겥47:9,12)
예수님은 이 생수의 강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뱃속에서 흘러 나리라고 말씀했습니다.(요7:38)
성경은 이 세상을 고해와 같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흘러넘치는 수정 바다의 평강을
우리 마음에 흐르게 하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서 흐르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평강이 바다 같이 내 안에 흐르게 함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동안
평강으로 이끌어 주심니다.
예수님도 그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보좌 앞에 흐르는 수정 바다의 평화로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4. 네 생물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계4:6-8)

이 네 생물은 천사들입니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볼 때 천사들이 창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6) 이들은 6개의 날개로 양쪽의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뒤쪽의 두 날개를 발을 가리고 가운데의 두 날개는 창화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같다는 것은 외적 모양 보다 그들의 속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천사의 모습에 볼 수 있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동통신의 역할입니다.
열심히 날라 다니시면서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일입니다. 이들 중에 성경에 기록된 천사의 이름은 군대 장관 미카엘과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둘째는 정보 통신입니다.  
안과 주위에 눈들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정보 통신의 역할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처럼 무소부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지 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 보다 빠른 속도로 그들의 정부망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구속사의 성취를 위해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명령를 받들어 순종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들이 부러울런지 모르지만 훗날 주의 나라 가게 되면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들게 됩니다.
그러고 이 네생물 속에 속한 천사들 중에 하나가 지금도 우리의 수호 천사로 배당되여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예배의 광경
그럼 이들 보좌에 둘려서  한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배였습니다.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립니다.
이십사 장로들도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고 찬양을 하며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주일, 예배중심의 날로 거룩하게 잘 지키고 있는지요?
그리고 가정에서도 가정 예배로 자녀들과 함께 늘 모여 주님을 경배하는지요?

예배가 체질적으로 되어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예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항상 그 하나님앞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자를 주님은 찾으시고 그에게 각양각색의 좋은 것들로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배하자고 할 때 얼굴 붉히며 슬쩍 피하지 마시고 먼저 솔선하여 예배하자고 외치는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계시록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백육십육과 종말증세  (1) 2011.09.24
계시록 4장 강해 ①  (0) 2009.10.29
요한 계시록 2장 강해 ⑨부록편  (0) 2009.10.21
요한 계시록 2장 강해 ⑨  (1) 2009.10.13
요한 계시록 2장 강해 ⑥  (0) 2009.10.08
계시록 강해 2009. 10. 29. 14:52

계시록 4장 강해 ①


본 강해는 그라나다힐 한인교회 백동흠목사의  새벽 강단의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4장 강해  제1강
교회의 휴거적 사건과 하나님의 보좌

(계시록4장1-3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1. 휴거적 사건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 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4:1)

① 너무 때와 기한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했는데 사람들은 장차 될 이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 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갖는 것 같습니다. 교회 휴거전이나 아니면 휴거 후이냐? 을 관심을 갖는데 때와 기한에 대해서는 주님의 영역에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 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휴거 전이나 후 든 간에  장차 될 일들은 분명이 진행 되어질 것입니다.

② 교회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요한 개인에게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교회가 이 지상으로
부터 휴거당하는 사건으로 확대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4장 이후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요한 계시록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장차 될 일이 교회 시대가 지난 이후에 나타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③ 개인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이것은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도 요한 개인에게 명한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실제로 휴거당하여 영원히 지상을 떠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유배지 밧모섬에 있다가 풀러나서 다시 에베소로 갔기 때문에 진정한 휴거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개인적으로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도 휴거 당했고 엘리야도 불 병거와 불 말을 타고 휴거 당했고
또 예수님도 그렇게 올리어 가셨습니다.

결론:
4장에서의 휴거 사건이 개인적이나 교회적이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때와 시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기에 너무 그것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얻을 중요한 교훈이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사는 이 지상만이 다가 아니라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미래의 어느 날 죽음의 과정을 통해 그 세계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일생은 때와 기한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7) 
셋째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미래의 그 어느 날 집단적으로 지상 교회(성도)들이 다 함께 동시에 데려감을 받는 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 보좌의 모습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4:3)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늘에 보좌가 베풀어 있고 그 보좌위에 앉으신 이를
보게 됩니다. 사실 그 광경은 엄청날 것입니다. 바울은 도무지 자신의 언어로 가히
이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다만 요한은 이것을 기록하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아주 간단히 마치 어린아이가
동화 이야기를 쓰듯 그렇게 감동 받아 간단명료하게 기록했을 뿐입니다.
계22장5절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좌로부터 비추이는 빛 그 영광의 광체가 있었습니다.(히1:3)
어떤 광채들일까요?  

①  벽옥입니다.
아주 밝은 푸른색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 빛의 위엄으로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② 홍보석입니다.
이 빛은 붉은 계통의 광채로 다니엘도 그 보좌로부터 불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단7:9)
그런데 그 불꽃은 주님의 눈을 통해서도 비추었던 광채였습니다.(계1:14, 2:18)
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투시하고 통찰력이 있는 광채로 모든 것을 벌거벗어 드려내게 하는
빛입니다. 감히 죄와 어둠이 다 드러나므로 두려워하고 근접할 수 없는 그런 빛이
홍보석의 광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빛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③ 무지개의 형태로 나타난 녹보석입니다.
녹색의 빛은 평강과 안식의 마음을 주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언약의 상징으로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주시는 구원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녹색은 생명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거듭난 생명의 소유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빛의 광채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13:8)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영광의 광체는 이 3가지의 빛이 어울려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 나라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우기 때문입니다.(계21:23) 이 영광의 광체가 태초에 어둠을 갈라내고 빛을 비추이게 한 창조적인 빛입니다.(창1:2) 이 빛이 세상의 인간과 만물을 살리게 하는 생명의 빛입니다.(요1:4,9) 이것이 복음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에 비추이고 있습니다.(고후4:6) 그리고 이 빛이 치료의 광선이 되기도 했습니다.(말4:2) 이 모든 빛의 근원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비추이는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이 빛의 근원을 그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비추이는 나오는 그 광경을 요한이 본 것입니다. 아멘



'계시록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백육십육과 종말증세  (1) 2011.09.24
계시록4장 강해 ②  (1) 2009.11.04
요한 계시록 2장 강해 ⑨부록편  (0) 2009.10.21
요한 계시록 2장 강해 ⑨  (1) 2009.10.13
요한 계시록 2장 강해 ⑥  (0) 2009.10.08
행복한 가정만들기 2009. 10. 29. 14:05

세워주는 삶의 관계가 아름답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로를 세워주는 삶의 관계가 아름답습니다."                

                                                         
백 동흠목사

요새 부부관계가 어려움이 많습니다.
서로 세워주는 사명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나이에 따라 부부관계의 사는 패턴이 다르다고 합니다.
20대에는 서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 환멸을 참으면서 살고,
40대에는 서로 체념하면서도 살고,
50대에는 서로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필요해서 살고,
70대에는 서로 고마워서 산다고 합니다.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사람이 철이 들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연약한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당연히 서로 세워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한 가지 이유는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와 가정은 서로 세워 주는 관계가 되라고 주신 좋은 기관입니다.

어떤 분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에게 말하기가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말해야 하기에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며 남편이 평소에 문학적 재질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남편에게 격려합니다.
"여보! 실망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 공부를 열심히 해 보세요."
그리고 평소에 남편의 월급에서 조금씩 저축한 돈을 꺼내 보이며
남편에게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문학작품이 바로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였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
우리는 이보다 더 행복하고 더 성공적일 수가 있습니다.
조금씩만 더 이해하고 조금씩만 더 귀히 여겨 주면서 진정한 돕는 배필이요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런 우리의 관계를 통해 주님은 행복한 일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샬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