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QT-여호수아편 2009. 11. 27. 13:49

3. 한 걸음 앞서가는 곳에 미래가 있습니다.

제목: 이제 너는 일어나 가라.

말씀: 여호수아 1장 2절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1:2)


1. 묵상할 말씀

이제 너는... 일어나...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의지는 어쩌면 단호함인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대해 더 이상 연연하거나 안주 하지 말고 분명한 태도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2. 깨달음과 교훈
첫째는 과거에 발목 잡혀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했습니다.(빌3:13)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둘째는 한 걸은 앞서가는 곳에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만 한 걸은 앞서가는 곳에 미래는 열리고 있었습니다.

3. 삶에의 적용
과거의 상처에 묶여서 한 치 앞을 향하여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반면 항상 미래를 향하여 먼저 일어나 한 걸음 앞서 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떤 편에 속한 사람인가? 스스로 물어 보았습니다.

과거,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국의 영락 교회의 뒤뜰에서 만난 권사님 한 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키가 작았고 걸음 거리는 뒤뚱거렸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밝은 미소 띤 권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이 제 옆에 다가와 앉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젊은이 이름 나한테 알려 줄 수 있어?”
“왜요?”
저는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이제 내 나이 80이 훨씬 넘었는데 다리가 떨려 전도도 못하고 침이 말라 말하기도 힘이 들어 그런데 주님께서 아직 나를 데려가지 않는 한 가지 이유가 있어. 그것은 미래의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지. 가만 보니 젊은이도 주의 종이라고 주님이 일러 주셔서 기도 해 주려고 해. 그러니 이름 알려 주겠어?”

권사님의 이야기는 북한에서 홀로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보따리 장사하며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평생에 사명으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평생 한 교회에서 사명으로 교회를 세웠고 성도를 봉사 했고 두 자식을 사명으로 키워서 하나는 육군 장성, 하나는 대학 교수로 키웠다고 합니다.
이제 남은 사명은 미래의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주님께서 부르는 날 내 본향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렇게 승리하는 삶을 살았는가?”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말합니다.
“응 그저 한 걸음 앞서 갔을 뿐이야 항상 주님은 한 걸음 앞서서 나를 불러 주셨거든.” 저는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앞서가면서 사명으로 산 영적 거인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밝은 얼굴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일어나 가야할 터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앞서 가게 하는 터전 바로 그 곳이 나의 미래이고 거기에 주님이 나를 불렀습니다.

예수님!
저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이제 과거의 것을  단호히 끊어 버리고 날마다, 아침마다 한 걸음 앞서서 불러 주시는 그곳을 향하 가고자 합니다.
내게 주기로 작정하신 그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리게 하여 주세요.
이제 아침마다. 한 걸음 앞서서 일어나 가겠습니다. 아멘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4)

3분QT-여호수아편 2009. 11. 25. 12:52

2. 종의 삶이 먼저입니다.

제목: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수1:1)

1. 묵상할 말씀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부를 때 모세의 시종이란 명칭을 앞서서 부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눅22:27)
종의 삶이 먼저였습니다.

2. 깨달음과 교훈
첫째는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계승자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필요에 따라 순종해 주었고 필요따라 잘 섬겨 주었습니다.  
둘째는 종의 삶을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높여 주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불러 마침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3. 삶에의 적용
항상 지저분한 방과 책상을 보면서도 손 하나 까닥 안하고 그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차려준 밥 먹으면서 잘난 척하고 불평 투정하는 내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아! 이런 생활이 문제가 되는 구나 지적을 받았습니다.
먼저 종이 되어주고 먼저 섬겨주고 먼저 대접해 주는 종의 삶이 내 안에 없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D L 무디가 수련회를 인도할 때 신학생들이 숙소 안에 들어가면서 벗어논 신발이 엉망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 날 밤 아무도 모르게 신발을 깨끗하게 닦아 주고 신발장에 잘 정리하여 넣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신학생들은 무디 목사님의 섬기는 삶의 모습을 통해
더욱 존경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의 집에 오면 제일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신발입니다.
현관 문 앞에 신발이 쌓여 있습니다. 또 다른 신발을 신게 되면 다른 신발은 치우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신발이 계속 수북이 쌓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적하며 잔소리만 했지 제 자신이 먼저 종같이 섬겨 주지를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신발을 잘 정리 할 때까지 묵묵히 섬겨주는 자로 그들 중에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저도 여호수아 같이 시종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잘난 척하는 것이 있고 교만이 있고 자존심은 강하고
섬기는 체질이 없음을 알기에 저는 십자가 날마다 죽이고 주님의 인품이 내 안에 살아나기를 진짜로 원합니다. 아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7)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백동흠 칼럼 2009. 11. 22. 10:24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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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 맺는 열매입니다. 

                                                        백 동흠목사

나의 집에 전기가 들어 온다면
이 지구상에 전기 혜택을 입지 못하는 사람 20억명의 사람보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 맑고 깨끗한 수도물이 들어 온다면
10억의 사람보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한끼의  따끗한 밥을 온 식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8억명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보다 더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주의 교회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체포와 학대와 죽음의 공포속에 있는 30억명의 사람보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 안에 먹을 음식이 있고 따뜻한 옷으로 몸을 걸 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75%의 사람보다 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일고 내가 축복 받은 존재인것을 안다면은
이 세상에 글을 읽지 못하는 20억명의 사람보다 더 많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2006년도에 영국의 생크 탱크인 신 경제 재단(NEF)에서 나라별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미국의 150위, 영국이 108위, 일본이 98위로 나왔습니다.
한국도 행복지수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102위입니다.

그러면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남태평양 호주 근방의 섬나라 비누아투라는 20만명이 사는 아주 작은 나라었습니다.

지난 5월에 한국에 그 나라 관광청장이 방문했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 어떻게 그 나라 국민은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 바누아투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지요. 그리고 항상 서로를 나누어 주고 존중히 여겨주는 생활에
익숙할 뿐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는  바닷물 같이 마실 수록 갈증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우리의 행복을 좀먹는 벌레와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미래의 번영을 키우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의 절기에 진정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으면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내일을 참 좋은 날 주일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며 "큰 감사 간증의 날"로
전 성도 간증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세요 환영합니다.

3분QT-여호수아편 2009. 11. 21. 06:29

1. 내 인생의 무대는 잠시입니다.

1. 모세의 죽은 후에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요?
본 매일 QT는 간단하면서도 삶에의 적용을 위해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짧은 3분의 묵상으로 영의 양식과 삶의 적용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여호수아1장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 묵상할 말씀
“모세의 죽은 후에…….”
모세의 무대는 광야의 터전이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무대인 광야는 과거가 되어 지고 있고 가나안의 무대가 열리는 시점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는 광야의 무대와 함께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이제 모세는 과거의 사람이 됐고 그의 광야의 무대로 막을 내려지는 시점이
오늘 본문 여호수아 1장 1절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2. 깨달음과 교훈
첫째는 나의 때 나의 무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에게 모세의 무대가 있듯이...
둘째는 내 인생의 무대로 아주 잠시 후면 그 막이 내려 질 수 있음을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내려질 나의 무대를 앞에 두고 깊은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3. 삶에의 적용
정말 나는 잠시 후면 무대의 막이 내려질 나의 인생의 무대에서 얼마나 나의 주어진 삶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전혀 생각 없이 살아 왔던 나의 하루의 생활이 왜 이리 허점이 많고 생활이 무질서 한지 그리고 왜 이리 쫓길 것 없이 쫓기며 살았는지 주님앞에 고백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풍으로 쓰러진 후 약 4년간을 고생하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천국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데리고 가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경험을 한 후 약 1주일간은 얼굴이 밝고 목소리가 또리방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종 빨리 내 본향집에 가고 싶다고 입으로 속삭이듯 말씀하시더니 굳은 표정으로 계시다가 그렇게 돌아 가셨습니다.
처음 쓰려지신후 정신이 돌아 오신다음 제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동흠아 이제 나의 무대는 끝났단다. 이제 너의 무대가 열리고 있구나 잘해야 돼. 알았지?"
그런데 벌써 나의 자녀가 이만큼 커서 다가 옴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정말 빠른 세월 이제 곧 나의 무대를 비켜 주어야 할 텐데 너무나 허전해서 어떻하나?
생각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주님!
모세의 죽은 후에를 보면서 정말 저도 잠시 후면 떠나가야 하는 것이
나의 인생의 무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 볼 때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주어진 삶의 무대에서 보람과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주님 꼭 힘 되어 주세요. 아멘”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5:15-16)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
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백동흠 칼럼 2009. 11. 18. 04:11

감사는 미래의 번영을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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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는 미래의 번영이 자라게 합니다.

                                                          백 동 흠목사


1. 청교도들의 역사

청교도라는 언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564년 경 교회의 강력한 힘을 가진
영국의 주교들이 그들의 관구 승려들에게 영국교회의 기도서와 예배의식, 승려예복
등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이에 대한 거부한 무리들을 청교도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란 제 1차적으로 영국교회(앵그리칸이즘)을 배격하고 더 나아가서 카톨릭을
배격하려한 16~17세기 영국의 신교도 일반인들을 칭하여 청교도라고 했습니다.

청교주의가 내세우는 종교의 보편적 진리는 형식보다는 내면을 강조하는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종교의식의 절차를 화려하게 꾸며놓고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따르는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믿었습니다. 결국 박해를 받은 이들 청교도들중에 몇 사람(146명)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1620년 신대륙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2. 청교도들과 추수 감사절의 유래
1620년 180톤의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시속 2마일의 속도로 117일간의 운항속에 신대륙 플리머스 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날이 12월 26일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
향토병으로 죽은 사람이 44명이나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극에 달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믿음으로 그해 겨울을 이겨냈습니다.
그 해 봄 가져온 밀과 보리의 씨앗을 심었으나 실패했을 때 그 지역 인디안의
도움으로 옥수수, 감자, 호박, 햇곡식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인디언들을 초대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감사절을 지킨 것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된것입니다.

이때 이들이 감사한 것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이곳에 올 수 있는 작은 범선이나마 주신 것을 감사
둘째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맞아 큰 돗이 부러 졌고 몇 자매님이 심한 파도에 휩쓸렸으나 무사히 구출된 것을 감사
셋째 항해 기간 중 두 명이 죽었으나 새 생명 새 아기가 태어남을 감사
넷째 117일간 3개 월동안 고통이 심했으나 결코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음에 감사
다섯째 첫 겨울 비록 몇 분이 죽었으나 죽음의 겨울을 이긴 것에 대한 감사
여섯째 좋은 원주민 친구들을 만나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3. 감사절의 시작
그 후 3년 후 메사추세츠의 주지사 월리엄 브래드퍼드는 감사절을 제정하여
선포합니다.
“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선포합니다.
주후1623년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온 가족이 다함께 교회에
모여 예배하며 이 모든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선포 합니다.”

그후 각 주마다 추수 감사절을 지내오다가 링컨이 대통령 된 후 마침내 국경일로
제정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의 경건한 조상, 청교도들이 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신앙의 유산을
우리의 후손들이 잘 계승하도록 이 날을 국가 축제의 날로 선포합니다.”

그 후 역대의 대통령들은 이 날에 온 백성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메세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들이 그 땅에 첫 발을 디딘 후 세운 첫 번째 것이 하나님의 교회 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격이 되었을 까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많은 형제와 자매가
고통 속에 죽어야 했고 이 낮선 땅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향한 신앙과 예배의 정신! 이 한가지 이유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드린 예배의 감격은 켰으며 그들의 드린 감사의 예물을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기초는 이런 믿음과 감사의 예물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믿음과 감사의 뿌리가 미래의 이 땅을 번성하게 한 정신사의 흐름인 것을 후손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한 개인의 미래를 번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미래를 번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한 나라도 미래의 번영을 불러오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
올해 부터 정말 감격스런 감사의 예배가 이번 추수 감사 주일부터
드려지게 되기를 기대해 보고 싶답니다. 아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