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만들기 2009. 11. 12. 09:33

말 한마디가 보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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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언어 환경은 어떤지요?

한 부부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넓은 바다를 보니 마음이 확 트이고 연애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넓은 모래사장에서 부부는 서로 업어 주자고 했습니다.
먼저 남편이 아내를 업자 아내가 감격하고 미안해서 "여보, 나 너무 무겁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머리는 돌이고, 심장은 철로 된 강심장이고,
몸은 요크셔니까 당연히 무겁지!"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 말에 아내가 삐쳐서 남편을 업어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그래도 업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할 수 없이 업어주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미안해서 "여보, 나 가볍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머리는 비었고, 입은 가볍고, 손까지 빈손이니 당연히 가볍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남편의 얼굴은 굳어지면서 창백해 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내는
“자기가 그렇게 말해서 나도 농담으로 그렇게 한 건데...” 그러나 이때는 늦었습니다. 즐겁게 떠난 여행이 차갑게 식어져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한달 이상이나 갔습니다.

부부싸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결론은 "100% 일방적인 잘못은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 죄와 허물도 있지만 내 죄와 허물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허물은 말에 대한 덕목의 부족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입술을 잘 지킬 때 그의 사랑과 인간관계도 잘 지켜집니다.

우리 한국의 부부는 사랑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언어가 받쳐 주지를 못하고 있답니다.
자꾸 훈련 삼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에 달달 외워지게 해야 합니다.
“사랑해, 훌륭해, 당신은 정말 좋아, 정말 당신이 있어 난 행복해..”

보약이 필요 없습니다. 나의 따뜻하고 배려해 주며 인정해 주는 말 한마디가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식에게까지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게 됩니다.

스스로 물어 보기 바랍니다. 나의 언어환경은 어떠한가를....

행복한 가정만들기 2009. 11. 4. 20:11

행복은 물같이 낮은 자리에 고입니다.



                내 탓으로 돌리세요. 그럼 행복해 집니다.

                                                                    백 동흠 목사

어느 마을에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집은 참 삭막했고 썰렁했으며 가정의 식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겉돌았습니다.
사랑이 식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데 부모끼리 또한 자녀들끼리 자주
다투고 싸우고 했습니다.
또 한집은 가정의 분위기가 따뜻했으며 가족 상호간에 서로 위로와 격려가
넘쳐 습니다.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피부 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결코 가정 안에 큰소리 지르는 것도 없고 다투거나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 우리의 가정은 전자의 가정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후자의 가정의 모습인가요?

하루는 늘 다투며 싸우는 가정의 사람이 그렇지 않은 가정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네 가정은 그리 부요하지도 않은데 어찌 그렇게 화목하고 행복하게
사는가? 좀 나에게 평화의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평화로운 가정에 사는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우리 집은 나쁜 사람만 모여 살기 때문이지요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의아해 하며 이해를 못하는 것이 였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사람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어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물 컵이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발로 걷어차서 엎질렀지요.
내가 부주의해서 "물을 엎질렀노라"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의 하는 말이 "물 컵을 거기 둔 자기가 나빴노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옆에 계신 우리 어머님께 "아니다 애들아 내가 보고 치웠어야 하는데 치우지
못 한 내가 나빴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막내 놈이 "아빠 사실 은 물을 달래서 마시고 아무렇게나 둔 제가 나빴어요." 라고 말하더군요.
이 조그마한 일에도 서로가 잘못했다고 내가 나빴노라고 서로가 먼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싸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라고 생각이 드시는지요?
똑똑한 사람,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로만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조금 져 줄줄 알고 조금 빈틈도 보여 주고 그저 내 탓으로 돌리고
난 부족한데 당신 덕에 내가 산다고 상대방을 높여 주는 사람이 있는 가정은
행복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차라리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고전1:27,28)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 마음을 비웠으면 합니다. 행복은 물같이 낮은 자리로 고이게 되여 있습니다.
우리의 어설픈 똑똑함이 얼마나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가는지 모릅니다.
조금 손해 볼 것 같아도 나를 비어 놓으면 주님은 참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답니다.
한번 해 보세요. 곧 체험케 될 것입니다.  샬롬 ♬


계시록 강해 2009. 11. 4. 04:49

계시록4장 강해 ②

본 강해는 그라나다힐 한인교회 백동흠목사의  새벽 강단의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4장 강해  제2강
보좌에 둘러선 모습들
(계시록4장 4-6)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다음 사도 요한이 보좌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경을 보았습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24장로의 보좌가 있고 그 앞에 등불 일곱이 있고 그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보좌주위에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보좌에 둘러선 이들의 모습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이십사 보좌의 이십사 장로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

첫째 이십사 장로는 누구일까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장로의 보좌와 교회시대의 12사도의 보좌를 뜻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1장에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도 12 지파의 이름이 새겨 졌고(12)
그 성곽의 열두 기초 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새겨 져 있습니다.(14) 이십사 장로는 대표성을 띤 분으로 이 분들 이름 안에 이스라엘 민족안에 있는 성도와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들은 생명책에도 기록된 이름입니다.(20:12,15)

둘째 이십사 장로들의 모습은?
① 흰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흰옷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계19:8) 이 옳은 행실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얻어진 칭의와
함께 변화되어 성령으로 나타나는 행실들(성화)이 천국에서 세마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②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야1:12), 영광의 면류관(벧전5:4))외에 여러가지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주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우리도 훗날 금 면류관을 쓰고 그 이십사 장로와 함께 그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2.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영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계4:5)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와 직접 연결하여 우리 교회와 늘 함께 계셨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열두 사도의 보좌안에 들어가 앉게 될 것입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도 보좌와 함께 거기 계심을 보게 됩니다.
일곱 영은 일곱 교회와 함께 계신 성령님을 뜻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곁에 계셔 보혜사로 도우시고 계십니다.(요14:16)
그리고 이제 때가 되면 우리를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휴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열두 사도의 보좌에 앉게 될 때 성령님도 거기 함께 계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장차의 영광은 지금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 될 수 없다고 한 것도 그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은 모습을 보고 와서 말한 고백입니다.

3. 수정 바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계4:6)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수정 바다는 너무나 잔잔하고 맑고 평화롭고 아름답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유리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정 바다가 단순이 아름다운 풍경을 주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22장 1절에는 그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보좌로 부터 흘러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수정 바다를 이루고 있고 이것이 각 지역으로 생수의 강이 되여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변에는 생명 나무가 과실을 달마다 맺고 있고 그 잎사귀는 치료가 되는 신비한 명약이 되기도 합니다.
이 환상을 에스켈도 보았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 마다 만물이 소생하는 현상을 보았습니다.(겥47:9,12)
예수님은 이 생수의 강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뱃속에서 흘러 나리라고 말씀했습니다.(요7:38)
성경은 이 세상을 고해와 같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흘러넘치는 수정 바다의 평강을
우리 마음에 흐르게 하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서 흐르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평강이 바다 같이 내 안에 흐르게 함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동안
평강으로 이끌어 주심니다.
예수님도 그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보좌 앞에 흐르는 수정 바다의 평화로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4. 네 생물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계4:6-8)

이 네 생물은 천사들입니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볼 때 천사들이 창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6) 이들은 6개의 날개로 양쪽의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뒤쪽의 두 날개를 발을 가리고 가운데의 두 날개는 창화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같다는 것은 외적 모양 보다 그들의 속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천사의 모습에 볼 수 있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동통신의 역할입니다.
열심히 날라 다니시면서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일입니다. 이들 중에 성경에 기록된 천사의 이름은 군대 장관 미카엘과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둘째는 정보 통신입니다.  
안과 주위에 눈들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정보 통신의 역할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처럼 무소부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지 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 보다 빠른 속도로 그들의 정부망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구속사의 성취를 위해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명령를 받들어 순종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들이 부러울런지 모르지만 훗날 주의 나라 가게 되면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들게 됩니다.
그러고 이 네생물 속에 속한 천사들 중에 하나가 지금도 우리의 수호 천사로 배당되여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예배의 광경
그럼 이들 보좌에 둘려서  한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배였습니다.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립니다.
이십사 장로들도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고 찬양을 하며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주일, 예배중심의 날로 거룩하게 잘 지키고 있는지요?
그리고 가정에서도 가정 예배로 자녀들과 함께 늘 모여 주님을 경배하는지요?

예배가 체질적으로 되어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예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항상 그 하나님앞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자를 주님은 찾으시고 그에게 각양각색의 좋은 것들로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배하자고 할 때 얼굴 붉히며 슬쩍 피하지 마시고 먼저 솔선하여 예배하자고 외치는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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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강해 2009. 10. 29. 14:52

계시록 4장 강해 ①


본 강해는 그라나다힐 한인교회 백동흠목사의  새벽 강단의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4장 강해  제1강
교회의 휴거적 사건과 하나님의 보좌

(계시록4장1-3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1. 휴거적 사건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 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4:1)

① 너무 때와 기한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했는데 사람들은 장차 될 이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 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갖는 것 같습니다. 교회 휴거전이나 아니면 휴거 후이냐? 을 관심을 갖는데 때와 기한에 대해서는 주님의 영역에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 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휴거 전이나 후 든 간에  장차 될 일들은 분명이 진행 되어질 것입니다.

② 교회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요한 개인에게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교회가 이 지상으로
부터 휴거당하는 사건으로 확대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4장 이후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요한 계시록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장차 될 일이 교회 시대가 지난 이후에 나타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③ 개인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이것은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도 요한 개인에게 명한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실제로 휴거당하여 영원히 지상을 떠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유배지 밧모섬에 있다가 풀러나서 다시 에베소로 갔기 때문에 진정한 휴거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개인적으로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도 휴거 당했고 엘리야도 불 병거와 불 말을 타고 휴거 당했고
또 예수님도 그렇게 올리어 가셨습니다.

결론:
4장에서의 휴거 사건이 개인적이나 교회적이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때와 시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기에 너무 그것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얻을 중요한 교훈이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사는 이 지상만이 다가 아니라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미래의 어느 날 죽음의 과정을 통해 그 세계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일생은 때와 기한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7) 
셋째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미래의 그 어느 날 집단적으로 지상 교회(성도)들이 다 함께 동시에 데려감을 받는 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 보좌의 모습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4:3)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늘에 보좌가 베풀어 있고 그 보좌위에 앉으신 이를
보게 됩니다. 사실 그 광경은 엄청날 것입니다. 바울은 도무지 자신의 언어로 가히
이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다만 요한은 이것을 기록하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아주 간단히 마치 어린아이가
동화 이야기를 쓰듯 그렇게 감동 받아 간단명료하게 기록했을 뿐입니다.
계22장5절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좌로부터 비추이는 빛 그 영광의 광체가 있었습니다.(히1:3)
어떤 광채들일까요?  

①  벽옥입니다.
아주 밝은 푸른색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 빛의 위엄으로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② 홍보석입니다.
이 빛은 붉은 계통의 광채로 다니엘도 그 보좌로부터 불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단7:9)
그런데 그 불꽃은 주님의 눈을 통해서도 비추었던 광채였습니다.(계1:14, 2:18)
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투시하고 통찰력이 있는 광채로 모든 것을 벌거벗어 드려내게 하는
빛입니다. 감히 죄와 어둠이 다 드러나므로 두려워하고 근접할 수 없는 그런 빛이
홍보석의 광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빛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③ 무지개의 형태로 나타난 녹보석입니다.
녹색의 빛은 평강과 안식의 마음을 주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언약의 상징으로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주시는 구원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녹색은 생명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거듭난 생명의 소유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빛의 광채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13:8)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영광의 광체는 이 3가지의 빛이 어울려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 나라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우기 때문입니다.(계21:23) 이 영광의 광체가 태초에 어둠을 갈라내고 빛을 비추이게 한 창조적인 빛입니다.(창1:2) 이 빛이 세상의 인간과 만물을 살리게 하는 생명의 빛입니다.(요1:4,9) 이것이 복음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에 비추이고 있습니다.(고후4:6) 그리고 이 빛이 치료의 광선이 되기도 했습니다.(말4:2) 이 모든 빛의 근원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비추이는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이 빛의 근원을 그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비추이는 나오는 그 광경을 요한이 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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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만들기 2009. 10. 29. 14:05

세워주는 삶의 관계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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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를 세워주는 삶의 관계가 아름답습니다."                

                                                         
백 동흠목사

요새 부부관계가 어려움이 많습니다.
서로 세워주는 사명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나이에 따라 부부관계의 사는 패턴이 다르다고 합니다.
20대에는 서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 환멸을 참으면서 살고,
40대에는 서로 체념하면서도 살고,
50대에는 서로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필요해서 살고,
70대에는 서로 고마워서 산다고 합니다.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사람이 철이 들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연약한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당연히 서로 세워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한 가지 이유는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와 가정은 서로 세워 주는 관계가 되라고 주신 좋은 기관입니다.

어떤 분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에게 말하기가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말해야 하기에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며 남편이 평소에 문학적 재질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남편에게 격려합니다.
"여보! 실망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 공부를 열심히 해 보세요."
그리고 평소에 남편의 월급에서 조금씩 저축한 돈을 꺼내 보이며
남편에게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문학작품이 바로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였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
우리는 이보다 더 행복하고 더 성공적일 수가 있습니다.
조금씩만 더 이해하고 조금씩만 더 귀히 여겨 주면서 진정한 돕는 배필이요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런 우리의 관계를 통해 주님은 행복한 일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샬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