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1. 6. 25. 08:18

울지마 톤즈



울지마 톤즈

                                        백 동흠목사

그들의 삶은 생존을 위한 전투였습니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투쟁외에는 없었습니다.
내전으로200만여명이 죽었고 300만여명이
자신의 땅에서 쫓겨 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딩카족은 전사가 되여야 했습니다.
치아를 쌩으로 몇 개씩 뽑아내고
이마에 불칼로 V자의 글짜를 몇 겹씩 지졌습니다.
그들은 용맹해야 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가 되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울기력도 없지만 눈물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극한 빈곤과 질병을 운명같이 짊어 지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야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순한 양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진한 향기가 묻어져 나왔습니다.
그가 암 투병중에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모두가 한결같이 울었습니다.

어느틈엔가 그들의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그들의 눈빛과 눈물속에 그득한 향기가 피어 났습니다.
죽어서 꽃이 된 사람
냉소와 살벌한 가슴안에
꽃이 되어 아름다운 향기가 피어나게 한 사람

짧은 8년의 톤즈의 생활
그리고 3년의 투병
48년의 생애
항상 환하고 밝은 얼굴
검게 그을리 얼굴의 웃음
그들과 함게 어울리며 섬겨준 삶
그리고 죽어서 꽃이 된 남자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태석신부님….(110524)


2011. 6. 25. 08:05

아버지



아버지

           백 동흠

아버지의 등은
넓었습니다.
그 등에 업힐 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몹시 켰습니다.
삶이 힘겨워 무너질 때
잡아 주는 그 손길에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웃음은
인자했습니다.
마음으로 움츠리고
굳어져 갈 때
언제나
넉넉하게
밝음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눈길은
사랑이었습니다.
차라리 말은 없었지만
그의 눈길 속에서
희망을 향해 가도록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시절
험한 인생
살아오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오셨는지
아버지를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 떠난
그 자리에 초라하게
서 있는 제가  
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운지를
아버지가 되어
비로소 깨닫고 있습니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가 몹시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시작 노트
돌아가신지 꽤 오래 됐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그립답니다.
항상 밝게 웃는 그 얼굴 그 모습이
왜 이리 보고 싶은지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다 무너지고
초라한 이름이 되어 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스스로 보면 그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 주신
아버지의 모습이 왜 이리 존경스러운지
아버지를 부르다 보니 눈물이 났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이…….(1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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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24. 12:41

그 누가 알았을까요?


그 누가 알았을까요? 

                       백 동흠

바람에 날리듯
어느 날
한 알의 씨앗이
천박한 땅에 떨어 졌습니다

말라버린
연한 순같아서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고
흠모할 만한
그 무엇도 없어서
누구 하나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옷 입었고
친히 병 들었고
목 말라
한 그룻의 물을 요구하며
피곤에 지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 누가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까요?

아무도 모르게
철저하게
홀로 그렇게 가신
그 길이
나를 대신하여
나의 삶을 살아 주신
대속의 길임을
누가 알았을까요?

죄수가 되고
살인자가 되어
죽음의 형틀을 메고
사망으로 내려가신
그 길이

내가 가야할
형벌의 길임을
그 누가 알았을까요?

빛을 어둠으로
대적하고
사랑을
미움으로 응답하며
많은 것을 받았건만
여전히 등 돌린

어둡고 천박한
이 땅의 사람들 속에서

보아주는 이 없고
알아 주는이 없건만
외롭고 홀로
그 길을 가게한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요?


시작 노트

요즈음에는 교회에서 철야하며 지낸답니다.
깊은 밤 기도중에 마음이 불같이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연상이 되여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친히 예수님이 메말라 버린 연한 순 같이 되어
가난에 질고에 그리고 저주의 환경속에
살아 주신 것이 나의 삶을 대신 가주신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가야할 형벌을 길을 대신 가게한 그 사랑이 왜 이리 아름답고
고마운지 마음이 몹시 뜨거웠습니다.
그 순간 떠오른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1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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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흠 칼럼 2011. 6. 24. 12:30

그날이 제게는 6도의 악몽이었습니다..


그날이 제게는 6도의 악몽이었습니다. 


                                              백 동흠목사


제게는 그날이 6도의 악몽같은 날이었습니다.
저의 노트북과 300 GB 짜리 Hard Disk를
동시에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누군가가 홈쳐 갔습니다.
저는 주로 노트북과 하드에 나의 모든 것을 담아 놓았습니다.
혹 노트북을 새로 바꾸거나 잃어버려도
하드만 잘 보관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쓴 시들과 글, 저의 설교들과 제가 만든 성경공부 교재들,
10년 치의 교회의 주보와 서류들
QT교재들과 평소에 파일로 모은 책들과 예화, 자료,
성도들의 사진과 개인 사진, 의미 있는 동영상들과 그림들,
앞으로 허락이 되면 책으로 출판하려고 준비해 놓은 글들,
아무리 큰 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저의 자산들입니다.
300 GB의 Hard Disk에 채워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노트북과 하드를 동시에 몽땅 가져갔습니다.
두 개를 동시에 잃어버릴 줄은 상상을 못했습니다.

첫날은 멍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으며 멍해지는 가 봅니다.
둘째 날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눈물이 저절로 났습니다.
셋째 날은 분노가 올랐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다 컴퓨터가 필요하고 자료가 필요하고
프로그림이 필요하고 그래서 생각하면 화가 막 났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교회에서 밤을 지새웠을까요?
누군지 그 놈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가져오기를 은근히 속으로 바랬나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기도 중에 예수님은 제게 말했습니다.
빌3장8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었습니다.
네가 그것을 잃어버리고 더 많은 시간을
주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었습니다.

컴퓨터를 잃어버린 지 보름이 넘어 가는 날입니다.
컴퓨터가 없으니 아무 할 일 없었습니다.
꼭 중독된 사람같이 멍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 하나 있었습니다.
컴퓨터에게 의존된 나의 삶이 얼마나 나의 영성을
허하게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세대에 컴퓨터가 없으면 안 되는 세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다시 컴퓨터를 사고
이전의 일을 또 해야 하고 푸른 편지도 계속 쓸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솔직한 심정은
컴퓨터 없는 지금이 제게는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어제도 교회에서 철야를 했습니다.
솔직히 철침이지요.
예수님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은혜를 채워 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땅의 것이 왜 이리 허망한지
부질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푸른 편지도 보내 드리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문의의 글을 보내 주셨는데
일일이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110415)


백동흠 칼럼 2011. 3. 29. 10:19

까레이스키를 아시는지요?




까레이스키를 아시는지요?

                              백 동흠목사

수확을 앞둔 1937년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러시아인들이 총칼을 겨누었다.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함이었다.
“내가 농사 지운 것 거두기 전에는 절대 가지 않겠소.”
농부의 절규였다.
탕탕탕 농부는 군인의 총에 꼬꾸라졌다.
따냐 할머니는 숨이 끊겨진 아버지를 땅에 묻지도 못하고
기차에 올라타야 했다.
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떠났다.
기차는 요란한 기적 소리를 내며 밤낮없이 쉬지 않고 달렸다.
“배가 고파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지비.
그래도 우리 고려인들은 종자씨앗 만큼은 먹지 않았음둥
심지어 피붙이 손주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종자씨앗은 몸에 꽁꽁 묵어서 지니고 있었지비.”
기차가 멈춘 곳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카자흐스탄의 황량한 광야 한가운데였다.
까레이스키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되였다.
위의 글은 까레이스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이야기- 의 본문 내용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서 거주했던 고려인들을
당시 구소련 정권에 반하는 민족으로 분류됩니다.
1937년 8월 연해주 등지의 한인 지식인 2천500여 명이
간첩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됐습니다.
그해 9월 나머지 한인들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 행 열차를 타므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됩니다.
1937년 10월29일 작성된 소련의 강제이주 총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총 17만1천781명(3만6천442가구)이 124개 객차에 나눠 탔으며
우즈베키스탄으로 7만6천525명,
카자흐스탄으로 9만5천256명이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빈들에 내동댕이쳐지게 됩니다.
한인들은 콜호스(집단농장)를 이루고 모진 삶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천박한 땅, 잃어버린 족속으로 타국에 버려져 있었지만
한국 민족의 특유의 근면성으로 이겨냈습니다.
이전까지 엄두도 못 냈던 벼농사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농토를 개량하여 마침내 러시아 전역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곳이
되게 한 것입니다.
비록 굶어 죽어도 아니 내 사랑스런 손주가 배고파 울부짖어도  
피멍에 한 맺힌 가슴에 종자씨앗을 품었던 그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케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아름답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바로 그들이 까레이스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