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1. 3. 29. 10:19

까레이스키를 아시는지요?




까레이스키를 아시는지요?

                              백 동흠목사

수확을 앞둔 1937년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러시아인들이 총칼을 겨누었다.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함이었다.
“내가 농사 지운 것 거두기 전에는 절대 가지 않겠소.”
농부의 절규였다.
탕탕탕 농부는 군인의 총에 꼬꾸라졌다.
따냐 할머니는 숨이 끊겨진 아버지를 땅에 묻지도 못하고
기차에 올라타야 했다.
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떠났다.
기차는 요란한 기적 소리를 내며 밤낮없이 쉬지 않고 달렸다.
“배가 고파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지비.
그래도 우리 고려인들은 종자씨앗 만큼은 먹지 않았음둥
심지어 피붙이 손주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종자씨앗은 몸에 꽁꽁 묵어서 지니고 있었지비.”
기차가 멈춘 곳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카자흐스탄의 황량한 광야 한가운데였다.
까레이스키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되였다.
위의 글은 까레이스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이야기- 의 본문 내용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서 거주했던 고려인들을
당시 구소련 정권에 반하는 민족으로 분류됩니다.
1937년 8월 연해주 등지의 한인 지식인 2천500여 명이
간첩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됐습니다.
그해 9월 나머지 한인들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 행 열차를 타므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됩니다.
1937년 10월29일 작성된 소련의 강제이주 총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총 17만1천781명(3만6천442가구)이 124개 객차에 나눠 탔으며
우즈베키스탄으로 7만6천525명,
카자흐스탄으로 9만5천256명이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빈들에 내동댕이쳐지게 됩니다.
한인들은 콜호스(집단농장)를 이루고 모진 삶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천박한 땅, 잃어버린 족속으로 타국에 버려져 있었지만
한국 민족의 특유의 근면성으로 이겨냈습니다.
이전까지 엄두도 못 냈던 벼농사를 가능케 한 것입니다.
농토를 개량하여 마침내 러시아 전역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곳이
되게 한 것입니다.
비록 굶어 죽어도 아니 내 사랑스런 손주가 배고파 울부짖어도  
피멍에 한 맺힌 가슴에 종자씨앗을 품었던 그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케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아름답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바로 그들이 까레이스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