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3. 6. 18. 08:44

목사님! 이것이 과연 목회인가요?


목사님! 이것이 과연 목회 인가요?


                                         백동흠목사


2월 즈음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이 말씀이 너무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설교를 갖고 새삼스레 말씀하나 했더니

다른 분의 설교 말씀을 갖고 하신 말이었습니다.

좋다가 말았습니다. 후후


그리고 한 걸음 더 낳아가

그 설교 CD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 CD가 차안에도 몇 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불쾌한 마음이 안 들었습니다.

복음 자체만을 전해 주고 싶어 하는 장로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순수하신 장로님이십니다.


마켓에 전도용으로 갖다 놓은 그 설교 CD가 있었습니다.

그의 사진이 크게 붙여진 CD이었습니다.

장로님이 말씀이 생각이 나서

차안에서 들어 보았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많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6월 12일 어제였습니다.

“목사님 저 그 설교 CD 그냥 다 버리기로 했습니다.”

“뭐를요?”

“설교 CD 말입니다.”

“왜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게는 너무 실망이 되니까요.”


그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하는 교회에서 4월 7일 사임을 했습니다.

가족이 한 순간에 증발하여 사라지듯 그렇게 사임했습니다.

20주년기념과 임직식을 두세 주일 앞에 두고 그렇게 떠난 것입니다.

한 달로 안 돼 가까운 곳에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5월 중순)

700여명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 교회 성도님들이 몰려갔겠지요.

그런데 그 후 두 주간이 채 안 됐습니다.(6월초)

바로 저의 동네에 있는 비전 교회에 후임자로 오신다는 소식을

장로님이 들은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700명이 빠져 나간 교회는 어떻게 되고

목사님 한분을 믿고 몰려간 700여 명의 성도는 어떻게 되고

그런 목사를 청빙하는 비전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모습입니다.

장로님은 아주 많이 상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과연 목회인가요?”


어제 6월 11일자 중앙일보 종교 난에 오피니언 글이 실렸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의 성경적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힘의 원리를 숭상하는 교회만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청빙

나보다 힘없는 작은 교회의 목사를 더 좋은 조건으로 빼앗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자의 원리입니다.


목회

영성이 아닌 하나의 매니지먼트일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관리해 보았는지

많은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인지가 기준이 될 뿐입니다.


목사

지금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영성보다는 그런 설교자와 그런 관리자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 합당하다 인정이 되면

목회 윤리도 덕목도 사회적 지탄의 문제가 노출 되어도 비껴 갈 뿐입니다.

다만 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고 내 교회가 더 힘 있는 교회가 되면

모든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원리가 아닙니다.

강자의 원리, 힘의 원리요, 세속의 원리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지금은 계시록 시대로 들어가는 교회의 끝자락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교회입니다.

명품이고 귀족풍입니다. 물량적 가치의 것이 절대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실체와 영성에 대해 말하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계3:17)


지난 3월 4일 열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총회에서

홍정길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한국의 거대한 공룡 교회의 시대가 끝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시체 썩는 냄새가 계속 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어떻게 말씀으로 바로 서야 할지

두 눈 부릅뜨고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이게 과연 목회인가요?”

정말 아무런 색체 없이 순수하게 묻던 그 장로님의 질문 앞에

우리 이민 교회 목사님과 교회는 엄숙히 서야 할 때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3. 6. 18. 08:32

가슴에 박힌 못




가슴에 박힌 못


                      백동흠


이제는 하나씩 하나씩

빼냈으면 합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못 박힌 가슴이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박힌 가슴으로

살아온 삶이.....


이미 녹슬고 굳어 버려

아무 쓸모 짝이 없는 못


건들면 쓴 물이

올라오게 하는

상처가 되게 하는 그 못


가슴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둘씩

빼냈으면 합니다.


압니다.

알면서도

원하면서도


그렇게 아파서 뽑아내고 싶어도

어찌할 수 없이

살아와야 했던 나날들을

왜 모를까요?


그러나 이제

그렇게 살수는 없지 않아요?


미래를 위해서라도

보다 더 낳은 삶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가슴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어 버렸으면 합니다.


그것은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과거의 것인 것을!




**

어느 분이 계십니다. 너무 많이 아픈가봅니다.

건드리면 눈물샘에 아무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옵니다.

가슴을 보니 박힌 못이 많았습니다.

마치 고슴도치 같았습니다.


어제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아려 오는 아픔이 있겠지요!

안으로 스며 나오는 쓴물이 있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상하고 탄식하는 신음의 소리가 흐르겠지요!

그래도 주님을 믿는 분이기에

안으로 삭이며 힘겹게 이겨 나가고 있습니다.


왜 모를 까요?

그렇게 아려서 뽑아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픔을…….

그래도 조용히 권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가슴에 박힌 못 하나씩 하나씩 뽑아 보자고요.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가슴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보자고요.

그것은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과거의 것이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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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흠 칼럼 2013. 6. 18. 08:25

충동구매와 사탄의 전략

충동구매와 사탄의 전략


                                                     백동흠목사


마켓에서는 분명 이유와 명분이 있어 장바구니에 담아 물건을 사옵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 막상 꺼내다 보면 금방 후회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성을 뛰어 넘어 충동구매의 현상입니다.

매장에 독일 술과 프랑스 술을 나란히 진열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멋있는 노래를 틀어 놓으면 독일 술이

프랑스의 음악을 틀어 놓으면 프랑스의 술이 더 많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감성적 충동구매 현상입니다.

매장에서 제품의 소개서를 전해 줄때 가볍게 스킨십을 하게 되면

제품 구입에 더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

식당의 종업원이 계산서를 건넬 때 미소를 지으며

밝은 인사를 한 마디 하면 훨씬 더 많은 팁을 받는다는 것

이런 현상을 통해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식보다 무의식에 의해 쉽게 지배당한다고 합니다.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김헌식)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첫째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둘째는 그러나 이성적인 것 그 이상의 것에 의해 행동하고 선택한다.

셋째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실험한 결과 보이지 않는 감성에 의해

뜻밖의 것을 선택하는 측면이 강하다


이런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런 인간의 현상을 교묘히 이용하여

인간을 타락으로 몰아 간 것이 사탄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탄은 아담에게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하와에게 먼저 접근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이 더 감성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한 것이 하나님같이 된다는

더 멋있고 더 아름답다고 하는 감성적 충동입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게 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앎”이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이미 분위기와 상황이 충동구매의 현상으로 몰입된 상태입니다.(창3:6)

“먹음직했다.”

“보암직했다.”

“탐스러웠다.”

이것은 이성이나 의지와 상관없는 감성적 충동현상의 표현일 뿐입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사탄의 전술은 놀랍게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즈음 아담에게 있어서의 하와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이미 아담은 하와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이성이나 의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와의 표정과 눈빛은 이미 아담에게 충동구매의 현상으로

몰입되게 하고도 남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결과는 뻔 한 것이었습니다.(창3:6)

그리고 이성으로 돌아 왔을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과의 조지프 시몬스 교수도

“인간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성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판단하고 행동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는 순간적으로 충동구매 현상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성적 충동으로 음란하게 하고 순간의 충동현상으로

혈기를 부려 살인으로 몰아가고

순간의 충동현상으로 자살을 부추기기도 하고

순간의 충동현상으로 이혼으로 몰아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저는 그러기에 영성 훈련을 평소에 하자는 것입니다.

문을 닫는 훈련을 통해 사탄의 충동현상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과

골방으로 들어가 오직 주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훈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했습니다.(롬12:2)

사탄의 심리적이고 감성적 충동에 휘말려들지 말고

영성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강하게 나타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탄의 전략이 강하게 득세하는 종말의 때

내가 살고 자녀들이 살고 나의 가정이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3. 6. 15. 06:56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현장을 보면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를 보며


                                      백 동흠목사


4월 15일 월요일인

어제는 이상하게 마음이 참 심란했습니다.

마음이 자꾸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왤까?

세계적 가수로써의 샤이의 젠틀맨을 보고

지나치게 도색적인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한 것일까?

한국의 국회에서 동성애법을 통과한 것에 대해

성령의 탄식이 있는 것인가?

왜 이리 마음이 심란한 것일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답답하여 무작정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 영이 미국을 위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후에 인터넷을 통해

보스턴 마라톤 대회 폭탄 공경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3명이 사망

140여 명이 부상

현장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요즈음 계속

이 땅을 지키는 파수꾼에 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지켰던 그 땅을 지켰던 므드셀라를 사모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삼상7:13)

그렇게 이 땅을 사탄의 세력과

악의 충동 세력에서 막아 주시도록 하게 하는

그 한 사람 사무엘을 그리워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메일 하나를 받았습니다.

흘러 신학대학에서 온 메일입니다.

세미나가 있으니 오시리라는 내용입니다.

세미나 제목이 “탈 기독교 시대의 목회 사역”입니다.

지난날의 화려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던 교회와 기독교가

지금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세미나 안내었습니다.

꼭 참석하고 싶은 세미나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지금은 화려한 귀족풍의 대형 교회도

수많은 교세와 번영도

그리고 풍요로운 축복과 명품도 다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지금 교회의 흐름은 주변으로 자꾸 밀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꾸 “악화” 되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청빈과 청결한 맑은 영성의 소유자가 필요합니다.

이 성을 사하게 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그리운 시기입니다. (렘5:1)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그 한 사람이 필요한 때 입니다.(대하7:14)

이제는 어떤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말고

화려한 이벤트성 행사에 의존하지 말고

종교적 의식 안에서만 숙달된 모습으로 보이지 말고

실제로 삶과 인격이 그 생활의 현장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가 있으면 우리 모두가 살고

그가 없으면 우리 모두가 죽을 만큼 그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대가 그 한 사람이 되어 주지 않을런지요? (13.4.16)



백동흠 칼럼 2013. 6. 14. 00:07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셨는지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았는지요?

 

                                       백 동흠목사


요즈음의 대세는

그저 단순하고 웃기거나

굉장한 자극적인 액선 영화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현대인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미제라블은 2시간 30분짜리 영화입니다.

그리고 옛날 중세의 무대이고

내용도 고루하고 뻔 할 것이고

분위기도 굉장히 무겁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시간 30분 내내

나의 의식을 사로 잡아갔습니다.

내용이 아주 단순 단순하게 이어져 나갔습니다.

대사도 노래도 너무나 쉽게, 쉽게 이어져 갑니다.

그런데 마음에 감동이 전해집니다.

장발장의 강직한 진실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가난한 민중을 위해 정의 편에 선 젊은이들의 모습도

참 밝고 화사했습니다.

코제트을 향한 마리우스의 사랑도

마리우스를 향한 에포닌의 엇갈린 사랑도

그리고 수양 딸 코제트을 위해 장발장의 희생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노래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을 포기 하고

가난한 민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마리우스와

그를 살려내어 코제트에게

그의 사랑 마리우스를 선물하고 떠나는 장발장의 모습도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정의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모두 살아 나와 프랑스의 삼색기를 흔들며

바리케이드 너머

저 건너편, 내일에 대한 희망을 선포할 때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 이란 것을 흘렀습니다.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리케이드 건너편에 있음을 보여 주므로

역사는 시련과 고난에 대해 응전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장엄하게 보여주는 한편의 시 같았습니다.


어둠은 끝나고

태양은 밝아 온다.

우린 주님의 뜰 안에서

자유를 누리리라

사슬은 끊어지고

총 대신 쟁기를 들리라

그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와 함께 가자

그대가 염원하는 세상이

저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네!

민중의 소리 들리는가?

저 멀리 북소리 들리나?

내일과 함께 미래는 시작되지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오리니…….



행복한 가정만들기 2013. 6. 13. 23:33

설입니다. 설



설입니다. 설

                               백동흠목사


석 달 그믐날

음력설을 앞에 두고 이 날은 잠을 자면 눈썹이 쉰다고 했습니다.

밤늦게 까지 화투 치고 윷놀이도 하고

빚어 놓은 흰 가래떡으로 화로 불에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웠습니다.

어쩌다 잠이 들면 눈썹에 밀가루를 발라

설 아침에 눈썹이 하얗게 되어 깜짝 놀라기도 한 날이었지요.


차례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한 상에 둘러 앉아 찬양을 부르고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하기에

두 그릇 먹으면 두 살을 더 먹는 줄 알고 또 먹고 또 먹은 날이랍니다.


설빔 옷을 입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 세배 드리고

동무들과 어울려 썰매도 타고 팽이도 치고

연도 날리고 자치기도 하고 친척 집을 찾아가 또 떡국을 먹고

설 특선 영화도 보려 간 날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득히 잊혀져 가는 아주 먼 옛 날의

추억이기에 그리움도 삭아 버렸나 봅니다.

멀리 떠나 고향이 그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멀리 떠난 공간적 개념의 장소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먼 길

바로 “세월” 이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설을 앞에 두고 벌써 2년 째 누워만 계신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설인데 외가 집에 갈레요?”

“어떻게 가?”

“비행기 타면 되지요.”

“가야 없어. 다 죽었어.”

90이 넘은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맑은 눈동자는 그 시절 그 때를 그리듯 했습니다.

돌이켜 갈 수 없는 그 “세월”이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 편을 적었습니다.


아늑히

스며오는

사랑의 추억들

이젠

돌이켜 가기엔

너무 멀리

돌아온 길

못내

사랑이

아파서 운다.("세월" 중에서)


이번 설은 주일을 끼고 있었습니다.

백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거짓말 같네요^^) 주일 끼고 온 설입니다. 설

그래서 한 마당 설 놀이 시간을 주일 오후에 갖기로 했답니다.

오세요!

단 노래 한곡 쏠 준비하시구요. 노래방도 있으니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 가정만들기 2013. 6. 13. 23:22

여행중에 하얀 눈을 만났습니다.

여행 중에 하얀 눈을 만났습니다.


                                 백동흠


먼 여행 길

땅 끝에서 이어지는

하늘에서

하얀 눈을 만났습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하나가 되어

온 천지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이어지는

땅 끝

거기에는

하얀 추억도 살아 있었습니다.


내 사랑

그대와 함께

거닐던 그 길도


눈 장난하며

환하게 웃던 그 얼굴도


함박눈 오던 날

창가에 앉아

진한 차 향기 풍기며


함께 나누워 마셨던 그 찻집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얀 눈 길속에

아름다운 사랑을 만났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먼 여행 길

땅 끝에서 이어지는

하늘에서

하얀 눈을 만났습니다.


사랑스런

하얀 추억들이

거기에서 살아 있을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 Bishop 이란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지난 연말

그 곳의 겨울 숲을 보고 싶다는 아내의 요청으로 잠깐 다녀왔습니다.

오후 늦게 그 곳에 도착하여 모텔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열었습니다. 하얀 눈이 온 것입니다.

벤 차를 온 통 덮어 버린 눈이었습니다.

차 길 따라 나서는 하얀 길, 

빈 터 곳곳에 아이들이 나와 눈 장난치며 노는 것도

하얀 입김에 서려 있는 상가들도

차라리 따스하게 느껴지고 너무 다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Free Way 찻길의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산과 맡 닿은 하늘은 너무 장엄했습니다.


눈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얀 눈으로 덮인 Bishop의 숲은 낯설지를 않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보았습니다.

눈길에서 함께 어울리며 눈 장난치며 함께 거닐던

사랑스런 하얀 추억들이 세록, 세록 기억되어 나왔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좋았습니다.

먼 여행길 겨울 숲에서 하얀 눈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잊혀진 사랑을 만났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 여행이 되었습니다.(12/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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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흠 칼럼 2013. 6. 13. 23:03

나눔이 있는 곳에 행복이 시작됩니다.



나눔이 있는 곳에 행복은 누려집니다.


                                                 백 동흠목사


나눔은 풍요로운 행복의 시작인 것을 아시는지요?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 때,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성령의 감화가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까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는데,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록펠러 재단을 통해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눔은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반면 욕심은 불행으로 가는 길목이 됩니다.

사람은 죽을 때 아쉬워하는 것 3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과

둘째 좀 더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과

셋째는 좀 더 나누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작고 많음의 소유가 행복의 기준이 아니랍니다.

얼마큼 나누는 삶을 사는가가 행복의 기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