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3. 8. 3. 05:43

아미쉬(Amish) 마을에 다녀 왔습니다.




아미쉬 (Amish) 마을에 다녀 왔습니다. 

                                          백 동흠 목사 

이번 총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아미쉬 마을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에 따르면
청교도의 신앙의 맥과 흐름을 따라 
세속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과 어울리며
복음적 전통과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꼭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총회가 끝나는 날
마지막 식사 시간에 우연히 친구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극 TK을 2장 구입하여 주어서 
총회를 마친 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연극관이 아미쉬 마을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아미쉬 마을을 대충 탐방할 수 있었습니다.

비오는 오후입니다.
창창 밖으로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 
녹색이 우겨진 푸른 숲과 넓은 밭
그리고 아담하고 깨끗한 주택들
비오는 오후라 차에서 내릴 수 없었지만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아내는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연거푸 합니다.

저 건너 언덕바지에 말로 쟁기를 갈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젊은 농부의 모습도 보았고
통 큰 원피스 치마에 앞치마를 두른 케이프를 쓴 
여성이 밭일을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어린 소녀가 밭고랑에서 뛰어 노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꽤 많이 보았습니다. 
낡은 기차 객차를 모아 모텔을 만들어 논 것도 보았습니다.  

아미쉬에 대한 소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자체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8학년이 아미쉬 마을의 최종 학력이라고 합니다. 

저녁에 림프를 키고 TV 대신 책을 읽은 마을 
동네 사람들이 함께 경조사를 기뻐하고 슬퍼 해주는 마을 
새 신랑 신부가 살 집을 함께 지어 주는 마을 
남편은 농사일과 목수의 일을 하고
아내는 가정의 가사를 돌보며 자녀를 양육하는 마을
자동차를 거부하고 여전히 마차를 타고 다니는 마을
가정불화나 이혼이 없는 마을 
자연과 더불어 순리를 사는 행복한 마을
현대 문명이 싫은 것이 아니라 비인간화하는 현대문명으로 인해 
가족의 인격과 관계를 파괴하기에 자신들의 삶을 더욱 귀히 여기는 마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사는 교육으로 
중등 교육 8학년까지로 충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을  
빠르고 새롭고 편리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리고 단순하게 살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마을
실업자가 없고 모두 함께 일하는 마을
근면과 검소함으로 아침 해 뜰 녘부터 해질 녘까지 열심히 일하고 
황혼 녘 가정과 이웃과 함께 삶을 즐기는 마을 

후후 
제가 아미쉬 마을에 대해 좋은 쪽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제가 꾸민 이야기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재 미국의 6000만명이 탈 문명화를 지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New Age 운동을 하고 동양의 철학과 사상에 심취를 하고
자연 속에 묻혀 살고자하는 운동이 조용히 급속하게 퍼져가는 흐름 속에 
아미쉬의 공동체의 생태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미쉬 낙농장에서는 다른 일반농장보다 평균에너지를 83%나 덜 쓰고도 
단위면적당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산품은 100% 올가닉식품(Organic Food)으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구와 장식 그리고 건축기술은 최고의 기술직이라고 합니다.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사는 근면과 도덕성을 통해 얻어진 현상이고 결과 일 것입니다.  

이번 필라델피아 총회를 다녀오면서 
제게는 참 감명 깊은 현장 - 아미쉬 마을 - 다녀 온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3. 8. 3. 05:30

우리 동네 동네 마켓을 하는 어르신이 돌아 가셨어요.




저의 동네에 동네 마켓하시는 어르신이 돌아 가셨어요.

                                              백동흠 목사 

“날씨가 무척 덥죠?”
“수고가 많으시죠?”
“걱정이네요. 요즈음 사람들이 다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자투리 돈은 그냥 넣어 주세요.”
“오늘은 떡이 너무 맛있어서 그냥 드릴게요. 사모님과 맛있게 드세요.”

동네에 작은 마켓의 주인이 있습니다.
종종 마켓에서 무엇을 사서 계산할 때마다 제게 하시는 말입니다.

그 어르신을 대할 때 마다 항상 구수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온화한 얼굴로 대화해 주시는 말이 정감이 담뿍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사는 냄새가 모락모락 났습니다.
오늘의 뉴스를 화제 삼아 자신의 감정을 전해 주고
“10불 25전 인데 10불만 내세요.”
“시루떡 참 맛있습니다. 먹어 보세요.”
“이건 제가 많이 깎아서 파는 거예요.”
옛날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장터에 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사무적이고 무 관계적으로 사는 현대인들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나게 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이민 와서 지금까지 강산이 두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는데 
항상 그 모습 그 얼굴로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근처에 대형 한국 마켓이 있음에도 동네 마켓으로 건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저의 아내는 단골손님입니다. 주인아저씨가 너무 좋다고 합니다. 
지난 5월 25일 토요일입니다. 아내는 마켓에 들렸습니다.  
“아휴 우리 예쁜 손님 오셨네.”
아내는 답합니다. 
“아마 모든 손님이 다 예쁘게 보일 거예요?”
“아니 저는 거짓말 못합니다.”
“오늘 맛있는 떡이 왔는데 드셔 보세요.”

이것이 그분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그날 밤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저와 저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들은 것은
Memorial Day 연휴가 끝난 그 다음날 어느 집사님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내는 충격을 먹은 양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물었습니다. 예수는 믿으시지요?
그의 답변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럼요.”이었습니다.
충분이 한 교회의 장로님으로 봉직할 만도 한데 
직분 없는 “성도”로써 평생을 사셨다고 하네요.
천직같이 마켓을 지키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면과 성실로 
모든 사람 앞에서 친절과 봉사로 
살아온 삶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날 신앙의 껍질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참 많은데
차라리 순수한 인간으로 자신의 주되신 예수님 안에서 
가장 인간적으로 사시다가 주께 돌아가신 분이라 생각이 듭니다.
구수하게 소박하게 웃으시던 그 얼굴 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이제 주안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소서! 아멘



* 아래의 시는 언젠가 가까이 함께 살던 어느 분이 돌아 가신후 만든 시입니다. 
 그냥 적고 싶어서 적었습니다. 그냥.....


삶이란?

            백  동흠
          
삶이란? 
항상 죽음과 같이 가는 것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어져 갈까

그의 삶이 
나와 똑 같은 삶이었기에
그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있다

죽음은 
항상 살아 있는 것같이
다가오기에

오늘도
그를 맞이하듯
내 살아 있는 
삶을 사랑하며 산다.

백동흠 칼럼 2013. 8. 3. 04:56

지금은 도덕성의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도덕성의 회복이 필요한 때 입니다. 

                                                             백 동흠목사 

지금 우리 시대를 교회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2년 5월 대통령 후보인 오바마대통령 이 동성애를 합법임을 선언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빌리 그래함목사님이 몰몬교도인 롬니를 후원한다고 했을까요?
동성애 후보보다 몰몬교도의 롬니가 그래도 낫다는 
기독교의 거성의 몸부림일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백성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남침례 신학교 앨버트 몰러 총장은 
대선 결과를 두고 "개신교의 메시지가 미국인들에게 완전히 거절당한 것"이라며 
"이는 복음주의의 재앙(evangelical disaster)"이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새들백 교회의 릭 위롄 목사님은 
오늘의 시대에 교회와 모든 목사님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자살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들이 죽은 후 세상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교회와 성경에 대한 조소와 증오의 메일,
그리고 그 고통을 기뻐하며 축하한다는 소리에 
가슴이 더 아프다고 릭위런 목사님은 페이스 북에 글을 남겼습니다.

한국에서는 
홍정길 목사님은 “공룡처럼 거대한 교회의 시대는 끝날 것이고 
그 시체 썩는 냄새가 계속 날것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고 외쳤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남은 양심 1%” 의 대표라 할 만한 손봉호 교수는 
“지난 몇 십년간 기독교 윤리 실천운동은 완전히 실패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한국 교계의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김동호 목사도 
“지금의 이 상태로는 한국 교회 미래는 없다.” 라고 했습니다.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는 위기 상황입니다. 
교회가 핍박받아서도 아닙니다.
교회가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교회가 사람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에서 등을 돌린 것이 위기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 하는 것이 위기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도덕성의 위기입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의 도덕성의 회복입니다.

첫째는 교회는 뼈 깎는 참회가 있어야 합니다.

Trinity chapel의 짐 볼린 목사님 2008년 한 여성과의 부적절한 성적 관계로 
인해 교회의 모든 직에서 사임해야 했습니다. 
6년이 지난 최근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그 당시 7 만 명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6만 7천 명이 교회를 등 졌다고 합니다. 
이분들만 실족했을까요? 이 일을 통해 사회적 여론과 인식, 
그리고 이 일을 통한 사탄의 충동질을 어떠했을까요?

동성애 옹호 현상도
교회가 반대하고 정죄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사람은 너희들이 천국을 간다면
난 지옥이 더 좋다고 악풀을 써 논 글을 읽어 습니다.
너희가 반대하니깐 더 옹호한다고도 써 놓았습니다.

교회 자신의 부패와 비리, 성추행이 심한데 
세상에 대한 선지자의 소리 그 자체가 듣기 싫은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이 된 것입니다.(마5:13)
지금은 도덕성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교회는 돈을 버려야 합니다.

정신적 가치를 말하는 사람이 물량적인 돈에 
마음이 물들면 그의 영성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한국 교회가 병이 든 것은 물량적 가치의 질서,
기복적인 번영의 논리입니다.
교회는 아픈 자와 같이 아파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의 친근한 벗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울어 주어야 합니다. 

청부가 아닙니다. 청빈이여야 합니다.
오늘 교회의 모든 불미스런 사건은 돈과 연결 되여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사유화하는 세습도 돈의 문제입니다. 
청빙의 뒷거래도 결국은 돈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비리가 묻어지는 것도
다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심하게 다투게 되는 것도 결국 재산 싸움,
돈의 문제입니다.  
가난해져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청결해 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19:21)
지금은 교회가 특히 목사님들이 도덕성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입니다.

지난 번 한국의 분당 우리 교회의 이찬수 목사님이 
대형 교회를 해체하고 작은 교회를 지향할 것이라고 
한 마디 했는데 교계뿐 아니라 사회적 여론까지 엄청난 반응을 보여 
너무 당혹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민심의 반응입니다. 
진정 영적인 지도자요 정신적 지도자라고 한다면 민심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의 존경받는 큰 교회의 목사님들 몇 분이 모여
정상 회담(?)을 하고 큰 거 한 방 시원하게 터트렸으면  합니다.
지금은 도덕성의 회복이 시급한 때입니다.

중앙일보에 소개한 거창 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10계명입니다.
1. 월급이 적은 곳을 선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선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선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선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말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지금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들이 귀 기울고 들어야 할 
계명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3. 8. 3. 04:52

희망이 아름다운 것은 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아름다운 것은 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동흠 목사 

빛은 어둠속에서 아름답습니다.
희망이 아름다운 것은 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웅장한 것은 그 골이 깊기 때문입니다.

위스콘신 대학 심리학 교수인 해리 할로는 
원숭이 실험을 했습니다.
“절망의 구덩이”라고 하는 심리적 절망상자를 만들었습니다.

피라미드 형태의 상자입니다.
이 상자의 내면은 미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상자를 거꾸로 세웁니다. 
그리고 이 상자 안에 어린 원숭이를 가두어 놓았습니다.
저 위쪽에는 희망의 문이 있고 거기에는 맛있는 바나나가 있습니다.
어린 원숭이는 눈에 보이는 희망의 문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표면이 경사지고 미끄러워 얼마간 올라가다 보면 
도르륵 굴러 내려옵니다.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몸부림칩니다. 결국 미끄러져 원위치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하기를 여려 날이 지납니다.
여기서 한계를 알게 되고 심리적 절벽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바닥의 원 꼭짓점인 좁디좁은 바닥에 
꼭 끼어 꼼짝을 안합니다.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이런 상태로 30일이 지나니깐 멘탈이 붕괴되고
몇 개월 동안 지내 후 이 원숭이를 밖으로 풀어 주었는데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원숭이와 어울릴 줄을 모르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고
식사를 거부함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해리 할로는 엄청난 동물 학대에 대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만
절망의 무게가 스스로를 눌려 버린다는 사실을 
단명하게 보여준 실험이었습니다.

결국은 절망은 심리적 현상입니다.
주어진 나의 환경 속에서 
실패의 반복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계의 벽
꼼짝 달싹 못하게 하는 절망 의식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리적 현상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오신 분 중에 어떤 분은 
창살 없는 감옥 같다고 고백하는 분이 있습니다.
언어의 벽, 인종의 벽에 감금당한 심리적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은 실연의 벽에 묶여 사는 분이 있고
어느 분은 몇 번의 사업실패로 인해 좌절의 벽에 묶여 있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분은 텅 빈 방에 홀로가 되어  
막힌 단절의 벽 속에서 
안으로 울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목회의 현장에서 벽을 느끼는 분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창살 없는 감옥같이 다가오는 것이 
우리의 환경이고 상황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말하기를 고린도 후서 4장8, 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 
핍박을 당한다.
꺼꾸려 뜨림을 당한다.”

이것이 우리의 환경입니다. 
환경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동일하게 부정적으로 
다가와 우리를 우겨 싸이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절망으로 가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환경과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싸이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버림을 받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능력이 심히 큰 보배로운 주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합니다.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게 할 것(사43:16)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이기어 나온다는 것은 
위대한 정신이 될 것입니다.

어둡기에 빛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산이 웅장한 것은 골이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백동흠 칼럼 2013. 8. 3. 04:50

전통 결혼 보호법(DOMA)가 위헌이라고 하네요 2



전통 결혼 보호법(DOMA)가 위헌이라고 하네요? 2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


                                                    백 동흠목사 



왜 갑자기 결혼 보호법이 위헌이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배경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레즈비언 에디스 윈저 할머니의 배후자가 사별한 후 유산에 대한 
상속세를 36만 달러가 매겨진 것입니다. 2009년의 일입니다.
동성애 부부이기 때문에 감세 혜택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감세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한 법적 근거가 바로 DOMA이었습니다.

결국 항소하여 대법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레즈비언 한 할머니로 인해
DOMA가 불의한 것인가? 옳은 것인가를 판단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부부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함으로
전통 결혼 보호법이 위헌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이 판결을 보고  
오바마는 "법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근본적인 진리를 따르고 있다. 
모든 국민이 동등할 때 우리는 더 자유로울 것” 이라고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사랑이 무시를 누르고, 평등이 차별을 꺾고 승리를 거둬 기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인류애와 평등이 정의와 함께 승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결혼 보호법이 위헌으로 판정 난 모습을 보면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느꼈습니다.
불행하게도 골리앗은 미국의 거대한 교회이고 
다윗은 레즈비언 윈저 할머니였습니다.
83세의 레즈비언 할머니는 영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원초적인 결혼의 제도요,
인류역사에 가장 오래된 제도인 가정의 제도가 
한 레즈비언 할머니에 의해서 굴복당한 것이 
마치 거대한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허물어지는 걸까?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은 제게 말씀 하나를 떠 올라오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13절의 말씀입니다.
소금입니다.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두려웠습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2012년도 공식 통계가 77%가 기독인이라고 했는데
동네 구석구석마다 교회당이 세워져 있는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세워지는 결혼과 가정의 질서가 
다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왜 이렇게 쉽게 허물어지고 있는지 두려웠습니다.

저는 6월 26일 
83세 된 레지비언 할머니 앞에서 거대한 골리앗의 몸집으로 
힘없이 맥없이 무너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미국의 교회
그리고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가는 한국의 교회
이제는 그 맛을 회복하는 소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 “이제라도” 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이제라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같이 더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고 
더 악조건의 곳으로 찾아가 섬기는 목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만들어 뛰어난 도덕성을 회복하여 나갔으면 합니다.
그 물질과 풍요를 사회와 가난한 사람들에 다 돌려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앞서가야 합니다.
만약 그리하지 못하면 교회는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과 같아 질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성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모습일 뿐입니다.
성도에게 마음을 비우라고 하지만 말고 교회가 청빈으로 돌아가야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정신적 지도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해야 합니다.

동성애는 대세가 되어 졌습니다.
동성애 사건이 터질 때 마다 매번 뒷북만 치면서 당하기보다
이제 교회가 영성이 맑아지고 뛰어난 도덕성이 회복되어지면
첫째는 하나님이 막아 주실 것이며 
둘째는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의 뜻을 존중히 여기며 거부할 것입니다.
셋째는 동성애자들이 돌아 올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맑은 영성과 사랑으로 그들을 품을 것이며
구원 받은 백성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밖에 있는 동성애가 위기가 아닙니다. 
거대한 골리앗의 몸집으로 부풀리고 소금으로써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위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백동흠 칼럼 2013. 8. 3. 04:47

전통 결혼 보호법(DOMA)이 위헌이라고 하네요? 1


 

전통 결혼 보호법(DOMA)이 위헌이라고 하네요? 1 

     - 이제는 각개 전투의 시대 -

                                                        백 동흠목사 

어제입니다. 6월 26일
성경적 전통 결혼을 법으로 인정한 
DOMA(Defense of Marriage Act)가 불법이 된 날입니다. 
대법관 9명에 의해서 전통 결혼 보호법인 DOMA가 
5대 4로써 위헌으로 결정됐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미합중국은 너무나도 쉽게 동성애 결혼을 
정상적인 결혼으로 인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단 9명의 사람에 의해서 말입니다. 

행정부의 수반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 가정의 합법성을 선포한지 꼭 일 년이 되는 날(12년 5월)
사법부의 수반인 대법관들이
동성애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성경적 결혼 법을 부정한 날이 된 셈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동성애의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을 
전통 결혼 보호법인 (DOMA가 제한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한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배려와 그들의 동등한 권리와 
사회 보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얼마든지 이해가 됩니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로 인해 성경적 가정관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미래,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에 성적 타락과 혼돈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나……? 
진짜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을 위해서 열 개를 포기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는 부분을 보고 전체를 못 보는 어리석음 같았습니다.
셋째는 오늘, 그들의 평등을 위해 내일의 역사의 파멸을 못 보는 것 같았습니다. 
넷째는 또 하나의 선악의 과실을 먹는 인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절대 기준의 선 - 그 선을 넘게 되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망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런 현상을 보고 
마치 아이의 몸을 씻어 주고 그 더러운 물을 버린다고 하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이라 했고
빌리 그래함은 독약이 든 병에 설탕이라고 하는 이름을 쓴 것과 같이 
위험한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하면 온 세계는 순식간에 그렇게 퍼져 갈 것입니다.
벌써 한국도 흉내(?)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대세는 그렇게 굳어져 갈 것입니다.
소돔성은 대세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롯은 가정을 지키지 못 함으로 아내는 소금기둥이 됐고 
사위는 농담 따먹기 식으로 복음을 외면하다가 망했고
딸들은 음란의 체질로 물들어 아버지를 겁탈하는 여인들이 됐습니다.

저는 성도님들께 설교했습니다. 이제는 각개전투의 시대입니다.
내 가정은 내가 지켜야 합니다.
내 자식은 내가 지켜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다음세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외쳤습니다. 
마지막 이 땅을 지키는 므드셀라가 되자고 말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3. 8. 3. 04:44

6.25의 역사 정신 - 후대에게 이어 주어야 합니다.



6.25의 역사 정신 - 후대에게 이어 주어야 합니다. 

                                                 백동흠 목사 


지난 주일에는 역사를 보는 눈이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본문은 여호수아 22장 24절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 
르우벤 갓 므낫세 3지파가 요단강 동편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때 이 세 지파는 요당강 언덕에 큰 단을 만듭니다.
우상 단지로 오인한 나머지 지파가 급히 쫓아 와서 자초지종을 묻게 됩니다.

이때 3지파는 말합니다.
너희와 우리와는 요단강이 가로 질러 있다.
지금은 문제없지만 훗날 자녀들의 세대에는
요단강을 두고 나누워 질까봐, 갈라질까봐, 
그래서 서로 남남이 되고 서로 싸울까봐,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못하게 할까봐,
여호와의 분깃이 너희에게 없다고 할까봐,(수22:25)
자녀들의 세대를 위해 역사를 생생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기념의 단을 쌓았노라고 답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때가 언제인데(기원전 1200년경?) 
그 때부터 내일의 역사를 위해 생각하는 족속이 됐는가? 
유대인의 역사의식은 그냥 거저 생긴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6월 25일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깐 6.25를 경험한 세대와 경험 없는 세대의 숫자를 
알려 주었습니다. 760만 명 대 4040 만 명이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6.25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몇 퍼센트가 안다. 모른다. 그리고 남침이냐? 북침이냐? 
여기에 대한 단답형의 대답을 한 것으로 
역사가 배워지고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날의 역사가 오늘 내게 어떻게 다가오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교훈을 받게 하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핵심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51년 12월23일, 
의정부 북쪽의 한 도로를 달리던 미군 지프차 하나가 
한국군 운전병의 과실로 트럭에 정면충돌됩니다. 
그 지프차에는 미8군 사령관이 H.워커 중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워커 장군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때 즈음 그의 아들 S. 워커 대위는 24 사단의 보병 중대장으로 
중공군과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즈음 그의 아들 S 워커 대위도 24사단의 일선 보병중대장으로 
중공군과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있었습니다. 
워커 중장을 교통사고로 죽게 한 한국군 트럭 운전병은 사형을 언도 받습니다.
이때 워커 중장의 아들 S 워커 대위를 비롯한 미군참모들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면제 탄원서를 제출해 그를 구명하게 됩니다.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밴프리트 장군이 옵니다. 
그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가 공군 중위로 한국전에 자원합니다. 
52년 4월 2일 새벽 압록강 지역의 폭격 임무로 출격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실종 보고가 들어옵니다.
미군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장군의 아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밴프리트 사령관은 
성경 말씀 요한복음 15장 13절의 말씀을 말합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그리고 수색을 중지 시킵니다. 
이것이 6,25속에 스며 있는 땀이고 눈물이고 피 입니다.

6.25의 역사는 미군의 장성의 아들들만 
6.25에 참전한 숫자가 142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전사한 아들이 35명이라고 합니다. 
이게 역사입니다. 

그 속에 배어 있는 그 역사의 정신을 배우는 것
그 역사의 정신 앞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
우리의 후손에게 그런 역사의 정신을 이어 받게 하는 것
이것이 역사의식일 것입니다.

토인비는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6.25는 무엇이냐? 북침이냐? 남침이냐?
이런 질문 앞에 단답형의 안는 것- 그 이상의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정말 그대는 역사를 보는 눈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에 묻어 있는 
그 땀과 눈물 그리고 그 땅에 흘려진 그 피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그 역사의 정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정신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들의 다가오는 미래에 더 위대한 역사를 
적어 갈 것입니다. 왜요? 그들은 역사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영성 2013. 8. 3. 04:42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백동흠

아무리 밖에서 부는 바람이 거세어도 
마음을 지키는 사람은 
밖의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요동하는 물결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두려움 속에서도 뛰어난 평강이 있고
절망의 현장에서도 희망을 말하며  
넉넉하게 웃어 주는 사람이 될 있는 것은 
그 마음을 지켜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질서가 부셔지고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스며드는 사람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이 안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마음을 지켜낸 사람입니다.



****
다윗의 시를 통해 다윗의 삶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밖의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 탄원의 시를 올립니다.

다윗은 밖의 많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 위기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밖의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내면의 질서, 
마음이 붕괴 당할까봐 이것을 제일 무서운 위기로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깊은 내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셔지지 않도록 
얼마나 몸부림 쳤는지요.

다윗의 위대함은 밖의 시련과 환란을 이긴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과 싸워 내면의 질서를 지킨 
사람이었기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의 시련도, 사람의 핍박도 달콤한 유혹 속에서도 
마음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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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3. 04:32

유혹

유혹

     백동흠

작은 티인데
눈 안에 들어가면 
바위덩이 되듯이 

별것도 아닌 
작은 티가
내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거대한 
유혹덩이가 된다.

안되는데
안 되는 줄 아는데
그게 상식인데 
그 현장에서
그 순간에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얼마나 탐스러운지

하와의 자식이
누가 아니랄까봐
다들 그렇게들 
쉽게 넘어 간다. 

유혹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거대한 바위가 되게 하여
그렇게 파멸로 이끌어 간다.



****
어느 분이 피땀으로 저축한 남의 돈들을 꿀꺽했습니다.  
그리고 들켰습니다. 잡혔습니다.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이분이 못 견디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에 
“내가 미쳤지 그게 어떤 돈인데.........”

그러나 그 때 그 순간은 얼마나 달콤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전도서9장 3절이 생각났습니다. 거기에도 “미친 마음”이 있었습니다.

순간의 성욕도, 순간의 탐욕도, 순간의 권세도 지나 놓고 보면 
하나의 티끌일진데 그 현장 그 순간에는 그렇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는가봅니다. 

유혹은 그렇게 다가와 우리의 삶과 미래를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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