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1. 10. 15. 05:39

휴거 - 데러감을 당할 자신이 있으세요?



휴거 - 데려감을 당할 자신이 있으세요?

                                                     백 동흠목사

이번 주간에 우리 교회에서는
제3차 사무엘 특별 새벽기도 성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5시 30분에 시작하는데
저는 새벽 3시 30분 즈음 일어나서 교회로 갑니다.
그리고 동영상 보여 드릴 Projector 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강의안을 Copy 하여 성도님이 강의안을 보며
은혜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새벽 집회를 시작합니다.  
아마 이번 특별 새벽기도 성회가 끝나면
두툼한 종말에 대한 가이드 책자를 갖게 될 것입니다.

6일에 거쳐 드리는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날(월) 바벨정부와 세계화현상
둘째 날(화) 바벨 종교와 종교현상  
셋째 날(수) 육백육십육과 세계 경제 현상
넷째 날(목) 노아시대의 사회적 현상과 자연재해
다섯째 날(금) 전쟁의 역사와 아마겟돈
여섯째 날(토) 천년왕국과 새로운 질서

물어 보겠습니다.
위의 열거한 종말의 메시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요?

어떤 분은 세대주의 적으로 너무 집착하여 말씀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미래의 어느 시기와 때를 너무 신경을 써서
예언자적 냄새를 풍기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잘못된 자세입니다.

어떤 분은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 환상을 보았다.
내게 특별한 음성을 주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은 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객관화 시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려하면
이단이 될 수 가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어느 분은 너무 교리적으로 말씀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지식적으로는 성도님들도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은 지식덩이고 교리적일뿐입니다.

또 어느 분은 너무 식상하여 이젠 지쳐 버린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해 양치기 소년같이 너무 많이 속아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안 속는다는 태도로 종말론에 대해 아예 귀를 막아 버리고
그 자체를 안 듣고 안 말하려고 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목사님들이 외치는
모든 종말론적 메시지가 전혀 아닐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생각지 않은 날에, 알지 못하는 시간에”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마24:50)
그리고 “다 졸며 잘 새” 라고 했습니다.(마25:5)
어쩌면 다 빗나가고 다 어긋나고 다 졸고 다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하고 나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절대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더욱 악해져 가고 타락으로 몰아 갈 것입니다.
자연이 재해는 더욱 강도가 높아져 갈 것입니다.
나라와 국가들은 하나의 연합된 단일 정부와 종교와 경제권을
지향하여 갈 것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더욱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적 사건은 우리의 예상과 상상을 뛰어 넘어
우리가운데 다가 올 것입니다.

어차피 미래는 우리를 거쳐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의도는
다가오는 미래의 사건보다도
다가오는 미래의 그날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이것이 종말론에 대한 성경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0)

아직은 은혜의 때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날입니다.
지금 교리가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도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가는 것으로 땜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롯의 사위같이 농담 같은 신앙의 삶도 아닐 것입니다.

지남철이 흙을 흩어 나갈 때 흙의 성분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철의 성분은 지남철에 다 끌어당기어 붙게 되어 있습니다.
성분일 것입니다.
질의 성향일 것입니다.
그날 우리를 데리고 갈 그 휴거적사건이 일어 날 때
예수님의 질의 성향의 사람들은
그렇게 철이 지남철에 철커덕 끌리어 당겨 붙듯이
그렇게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있어야 하고(요3:5)
그의 교회 안에 소속되어 머물려 있어야 하고(히12:25)
체질이 되어 범사에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고 있어야 합니다.(엡4:13,15)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날!  휴거의 날
데려감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묻고 싶군요.(마24:40,41)
체질이 그리스도의 성향으로 변형된 흔적이 내 안에 고여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았으면 합니다.(고후13:5, 갈6:17)

백동흠 칼럼 2011. 9. 24. 07:02

SB 48 교육법안과 동성애



SB 48법안과 동성애


                    백 동흠목사

이미 동성애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곁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안방까지
스며 들어와 있고 어린 아이들과 학생들에게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화대학교내에 “변날”이란 동성애 동아리가 있다고 합니다.
“변날”은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의 줄임말 이라고 합니다. “
이 동아리의 회원인 한 여대생은
“나는 이대로의 나를 존중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차별을 받는 것이 현실이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래 사귄 그 사람과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변날”은 동성애란 하나의 인권으로 해석해야 하며
인류애로 수용해야 한다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의 고백입니다.
“남자나 여자 어린아이가 같은 동성에게 뽀뽀도 하며
나중에 커서 결혼하자고 공공연히 말한다고 합니다.
TV에서도 아저씨나 아줌마끼리 좋아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런 행동을 취한다고 합니다.
저도 종종 드라마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각인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양조위와 장국영이 주연을 맡은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 역을 맡아 주목을 받았던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와 상징파 시인 폴 베를렌의
동성애를 그린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
콜린 퍼스 주연의 “싱글맨”(A Single Man) 등등
다 꽃미남이 주연을 맡았고 아름다운 영상과 뛰어난 음악과
섬세한 감성적 표현 등이 작품으로써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미화한 영화에 불과합니다.

왜 현대의 문명과 문화는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고 심판의 기준이 되는
남색하고 여색하는 것을 옳다 인정하며 부추기고 있는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류애라, 인권의 존중이라 하면서 옹호해야 할 만큼
분별력이 없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의 교회는 백인 교회와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2008년도 Proposition 8을 거부할 때도 백인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예배 중에 “동성애 법은 안 됩니다.” 외쳤는데
어느 한 백인 여자가 흥분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더니
교회 뜰 앞에 꽂아있는 “Proposition 8 반대 푯말”을 뽑아서
멀리 던지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을 사랑으로 포옹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이런 사랑이 없는 교회는 원치 않는다.” 하면서
그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남색 하는 것, 여색하는 것,
이것은 분명히 죄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되는
가증스러운 것임을 분명이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인권과 인류애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2011년 7월14일
SB48 교육 법안이 상정되었고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서명하였다고 합니다.
이 법안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동성애의 결혼을
하나의 가정의 형태로 받아들이도록 교과서에 수록하고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재정하게 하는 행정 절차입니다.
이 법안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국립학교 선생님들은
동성애의 가정이 합법적이며 정상적인 가정과 같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법안은 동성애자인 샌프란시스코 주 상원 의원인 Mark Leno에 의해
발의 됐다고 합니다. 그의 강한 호소력은 인권과 인류애에 두었습니다.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자들의 삶은
단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이며
모든 사람들의 다른 스타일을 다 포용하는 것이 인권 존중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시는 것입니다.
여색하고 남색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되며
땅이 사람을 토하여 내게 하는(재앙) 죄가 되는 것입니다.

SB48 법안 철회를 위해선
오는 9월까지 총 65만 장의 청원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65만 장의 청원서가 접수가 되면 내년 선거에서 철회를 요구하는
주민 발의안을 상정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동참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미국의 격하되며 쇠퇴되며 무너지는 것은 정치나 군사나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은 영적으로 무장해제의 현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전략에 말려들어
청교도의 신앙이 부셔지고 경건한 가정이 해체당하며
학교나 관공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과 정신이 사라지면서
조금씩 몰락의 길로 가고 있음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지금 우리는 이 시대의 흐름을 바르게 분별할 때는 온 것 같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자녀들의 세대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미국을 위하여 울어야 할 때입니다.(2011.9.3)


백동흠 칼럼 2011. 9. 24. 06:54

회복 탄력성 지수 (RQ)에 대해 아시는지요?


회복 탄력성  지수 (RQ : resilience Quotient)에
                                             대해 아시는지요?


                                           백 동흠목사

에미 워너교수와 루쓰 스미스 교수팀이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833명의
어린이를 30년 넘게 추적하면서 조사를 했습니다.
이들은 가장 열악한 가정환경인 가정불화, 이혼, 마약과 도박
그리고 극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이런 아이들 중에 또 추려내어 최고의 위험군이라고 하는 아이 201명을
집중적으로 추적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은 이들 201명중 3/1인 72명은
밝고 명랑하고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2명에게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는 탄력성이 있음을
발견해 낸 것입니다.
워너 교수는 이를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회복 탄력성이란 한국적 표현은 오뚝이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체마다 탄성이 다르듯 사람마다 바닥을 치고 다시 오뚝 서는
탄력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후 학자들이 회복 탄력성을 분석하여 회복 탄력성을 키우는
지수를 밝혀냅니다. 이를 회복 탄력성 지수(resilience Quotient)
라고 했습니다.

그 원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육체의 근육도 훈련을 통해
강한 힘살이 되듯 회복 탄력성도 마음의 근력이라 했습니다.
선천적으로 마음의 근육질이 강한 사람도 있지만
얼마든지 훈련을 하게 되면 회복 탄력성의 근육질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시련과 역경을 다가와도
상처 받고 스스로 자살하거나 파괴적으로 가지 않고
이겨나가며 오뚝이 같이 인생의 바닥을 치고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회복 탄력성 지수를 소개 하여 드립니다.
우리가 훈련해야 될 회복 탄력성의 요인을 아래와 같이 제시합니다.
감정 통제력, 충동통제력, 낙관성, 원인분석력, 공감능력, 소통능력,
자아 확장능력, 자족력, 감사하기 등등입니다.

첫째는 자기 조절 능력입니다.
감정 통제와 충동통제와 원인 분석력 훈련을 통해 자기 조절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둘째는 대인 관계 능력입니다.
소통능력과 공감능력과 자아 확장력입니다. 이것을 훈련하여 대인 관계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셋째는 긍정성입니다.
이 긍정성은 낙관성과 자족력과 감사하기입니다. 이것을 훈련하여 자신에 대한
긍정성을 훈련해야 합니다.

여기 까지가 회복 탄력성의 책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회복 탄력성은 성령에 의해서
오뚝이 같이  일어서게 하는 회복 탄력성입니다.

첫째는 문을 닫는 훈련입니다.
밖의 소리들, 밖의 시련과 아픔의 사건들 그리고 외적 모든 환경으로부터
문을 닫는 훈련입니다. 이를 영성 훈련의 시작입니다.

둘째는 골방으로 들어가는 훈련입니다.
영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뜻합니다.
조용히 기도의 처소에 들어가 무릎을 끊고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6)  
 
셋째는 이때 내 깊은 내면에 신비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평강이 솟아오르기도 하고 상처에 대한 치유가 나오기도 하고
절망의 상황 속에 희망이 샘물같이 솟아 나오기도 하고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흘러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 치유가 나타나 회복 탄력성이 강하게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놀라운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우리의 삶은 항상 열악하답니다.
얼마든지 밖의 환경과 사람은 우리를 힘겹게 할 소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때, 그때 마다 마음의 근력도 키워 회복 탄력성 지수도 높이시고
영성훈련을 통해 내적 평강을 누리며 회복 탄력성을 발휘하여
오뚝이 같이 일어나 승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1. 9. 24. 06:34

미래는 미래를 그리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미래는 미래를 그리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백 동흠목사

가린샤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입니다.
그는 소아마비로서 지적 장애가 있었습니다.                    
24살에 지능지수가 33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른 쪽의 다리와래 왼 쪽의 다리의 차이가 6센티나 차이가 나는
기형 다리었습니다. 그래서 오른 쪽 다리는 바깥으로 휘어져 있고
왼 쪽 다리는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축구 시합을 구경하고 외치기를 나는 꿈을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나는 축구를 한다.
나는 축구 선수가 된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그 누구도 나를 막지 못 할 것이다.
나의 꿈을 막는 사람을 나는 용납 안 할 것이다.
가족의 반대도, 의사의 충고도, 친구들의 무시하는 것도
또한 나의 내면의 의심도 그 꿈을 결코 막지를 못 한다.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축구를 하게 됐고 국가 대표 선수가 됐고
월드컵 3회 참가했고 11년간 국가 대표 축구 선수로 활약했고
펠레이후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로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하버드대 심리학 연구소에서 보고된 내용입니다.
65세 이상의 정년 퇴직자들을 분석했다고 합니다.
사회 현상 속에 공통적으로 아래와 같은 경제 구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3:10:60:27의 비율로 경제적 부가 형성된 것입니다.
3%의 사람은 경제적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0%의 사람은 은퇴이전이나 이후의 큰 차이 없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60%의 사람은 간신히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7%의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도 사회 구조 속에 나타난 경제력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3%의 사람의 부요가 97%의 사람의 재산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3%의 사람을 분석해 볼 때 2가지의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들의 환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인종이나 학력, 인맥, 부유한 집안의 자녀, 재산의 유무 등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그 사람들은 미래를 그렸습니다.
3%의 공통점은 미래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미래의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고 미래의 목표에 대한 문서를 만든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히11:1)
여호수아는 그의 백성에게 미래의 땅에 대해 그리라고 했습니다.(수18:4)
예수님은 네 믿은 대로 된다고 했습니다.(마8:13)
바울은 네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엡3:20)
미래는 미래를 그리는 사람,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문서화한 사람에게
열려진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며 문서화 시킬 것인가?

첫째는 단순하고 명료화하게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갸린사는 단순하게 “축구선수 된다.”는 미래에 대한 그림을 가졌을 때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축구 선수 은퇴 후의 자신의 미래상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은퇴 후의 삶은 술과 여자로 탕진하다가 50의 나이에 일찍 죽었습니다.
단순하고 명료화된 꿈과 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방향성을 그쪽으로 몰아가야 합니다.
박찬호는 야구장으로 가야하고 박세리는 골프장으로 가야 합니다.
박지성은 축구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고민하고 대안도 만들고 대책도 세우고, 연습, 훈련하고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 하는 성경 말씀 중에 하나가 누가복음 13장33절의 말씀입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흐름입니다. 맥과 맥이 이어가야 합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로 이어나가야 하며 그쪽을 향하여 가는
방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죽어야 합니다.

셋째는 그려진 꿈과 비전을 달달 외우는 것입니다.
하루에 단 10분 만이라도 미래를 또리방하게 말하면 운명이 달라집니다.
미래를 달달 외우고 시인하고 외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목표와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가고자 한다면 역사의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어느 날 어느 틈엔가 그려진 나의 미래의 모습이 현실로 다가오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합2:2,3)

백동흠 칼럼 2011. 9. 24. 05:24

선교사님의 뒷 모습에서 거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교사님의 뒷 모습에서 거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백 동흠목사

어제는 선교 특강이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위클리프 선교회에 소속된 K 선교사님의 특강입니다.
안식년을 맞아 달라스에 안식처를 꾸미고
이곳 LA에 친척집에 방문차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선교 특강을 위해
사모님과 세 자녀와 함께 오셨습니다.
현지 사역을 동영상으로 보여 주셨는데
선교가 얼마나 무거운 하나님의 사명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쩜 우리가 행하는 선교와는 그 질과 무게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93년도에 위클리프 선교회의 소속으로 중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북서쪽의 내륙, D지역의 동향족의 땅으로 갔습니다.
중국에는 200개의 종족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이 뚱상족은 60만 명으로 인구로 언어가 없는 미 종족 부족입니다.
김 선교사님은 그들에게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언어에 근거하여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할 계획입니다.
사모님은 그림으로 문자를 표현하고 또한 소리를 언어로
만드는 한 부분을 남편을 도와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의 사역하는 동영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모님이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잠깐 스치듯 보였습니다.  
한국의 5-60년대의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가 머리에 수건으로
두건같이 두르고 50년대식 부뚜막이 있고 아궁이가 있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선교란 그들의 문화 속에 동화되어 들어간다고 배웠습니다만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옷을 입으며
그들의 주택에 거하며
그들의 언어를 말하며
그들의 생활수준으로 생활하며
그들 속에 나를 아니, 나의 가족이 완전히 녹아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복음 하나만을 위해 오지 같은 그런 땅에 들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선교였습니다.
선교란 살아서 죽는 순교 그 자체였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93년 이후 지금까지
20여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내 온 것입니다.
그 동안 전도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신을 도와 성서 번역을 돕는 원주민이 두 명 있으나 미온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30대의 젊음의 나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됐습니다.
눈에 보이는 복음적 결실도 업적도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 번역의 사역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태어난 어린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교육환경은 전무합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도 없습니다.
한국과는 단절되어 있고 그렇다고 현지 원주민도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문화와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현대 문명의 최고의 학문이 Ph. D 학위도 별 의미 없이
나이와 함께 녹슬어 버릴 것입니다.

아마 선교사님은 아무도 모르게 내적인 투쟁은 굉장했을 것입니다.
갈등과 좌절 그리고 공허로움과 무기력
사탄의 충동질과 번뇌와 번만 등등  
얼마나 많은 눌림의 세월을 보내야 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여 사명하나 붙들고
그곳에 뿌리내려 인내하며 인고의 세월을 사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생각 들었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선교사님의 한 마디의 말 속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었습니다.
“저 하나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제 마음 하나 지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20여년의 세월 속에 큰 위로와 보람은 이제 신약성서 번역 사역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사님의 기도의 제목은  
“이렇게 번역된 성경의 말씀이 60만 미 종족인 저들의 마음에
뿌려지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사모님은 참 조용하시고 가 여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적 강인함과 그 얼굴에 주님의 평강이 서려 있음을 느끼었습니다.
사모님은 말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첫 아들과 둘째 딸이
인터넷으로 공부하여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차를 타고 떠나는 선교사님의 뒷 모습에서  
거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주의 나라에서 유명한
유명 인사를 뵌 느낌을 받았습니다.

* 선교사님에게 허락받은 글이 아니기에
 개인의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1. 7. 29. 11:20

서울의 물 폭탄과 가이오 이론

서울의 물폭탄과 가이오이론

                                           백 동흠목사

저는 종종 태평양 연안의 바닷가를 나갑니다.
우리 집에서 30분 나가면 말리브 해변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아름다운 대학으로 손 곱는 페퍼다임 대학교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 대학의 창가에서 보이는 태평양의 바다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바닷길을 있는 해변 도로와 평화로운 차량 행렬과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물결과
서편으로 기우는 태양과
온통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
바다 끝자락에 보이는 끝없는 수평선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순간 외치고 맙니다.
“와- 이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자연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룩(James Lovelock)이
가이아이론(Gaia Theory)을 제시했습니다.
서울의 물벼락을 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러브룩은 지구는 스스로 생존 능력을 갖고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제시했습니다.
지구의 생존 나이 6억년 동안 21%의 대기 중의 산소를 유지 했습니다.
생물의 생존하기 최적의 온도 평균 13도를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모든 어류들의 유리한 생존 조건인 바다의 염분 킬로 그램당 35그램을 유지했습니다.
지구는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질서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해 줌으로 생태계와 질서를 스스로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오염이 초과되고 자정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자연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 온다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 자연 파괴의 주범인 인류도 함께 멸망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오존층의 파괴,
식물 엽록체의 파괴,
수중생물의 감소,
면역기능의 약화,
세계 기상의 이변,
지구의 온난화와 엘리뇨 현상
산성비의 사막화 현상
하천과 해양의 오염으로 매년 2만 5천에서 5만종의 생물의 종수의 멸종 현상 등등

이것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종말적 사건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신문을 보면 “서울 폭우 대란”
“100년만의 물 폭탄” 이란 큰 글자로 도배를 했습니다.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쏟아 부운 물이 일 년 강수량의 절반을 단 4일 만에
쏟아 부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물 폭탄이 쏟아지기 바로 전 날은
40도를 육박하는 폭염과 열대야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바로 전에는 강력한 태풍이 쉴 새 없이 찾아 왔다고 합니다.

서울의 기후 대란은
가이오의 이론에 의하면 오염이 누적되어 환경 용량이
초과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쩜 이미 늦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안 늦었다면
우리 자연 앞에서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의 질서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뛰어난 도덕성의 회복을 찾아가야 합니다.
도덕성의 타락은 자연의 재앙을 불러 오게 한다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이제 대세는 그렇게 흘러 갈 것입니다.
종말의 현상은 온 지구적으로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 파괴 현상은 계속 될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욱 사랑할 것이고
사람들은 더욱 패륜화 되어 질 것이고
사탄의 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재해는 이와 맞물러 극대화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더 이상 감당 못할 때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만” 조용히 데려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편애라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은혜의 때 구원의 날을 충족히 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고 있답니다.
“공갈은 치지 말라, 거짓말이니깐,
그러나 협박은 할 만하다. 목숨이 아깝거든 예수님 잘 믿으라고...” ^^

정말입니다.
우리 예수님 잘 믿고요.
이웃 사랑하고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전도하고요.
재해의 한복판을 지나가더라도
우리 서로 위로하며 이겨 나가도록 했으면 합니다.
잠시 잠깐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1. 7. 29. 11:18

라면왕 이철호

라면왕 이철호-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백 동흠목사

중학생 때 한국전쟁의 한복판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전쟁 통에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미군 부대에 얹혀 잔심부름꾼으로 연명하다가
군부대의 폭격 때 온 몸에 심한 파편을 받게 됩니다.
의학적 사망 판단을 받고 시체실에 옮겨집니다.
시체들을 수거해 땅에 묻으면 끝날 인생인데
그 다음날 극적으로 눈을 뜨게 됩니다.
온 몸은 살이 썩어져 가고 구더기 겨 다녔습니다.
이때 슈나이더 미군장교와 노르웨이 의사 파우스 박사의 도움으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노르웨이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4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아 절름발이였지만 살아나게 됩니다.

불러 줄 사람도 없는 가난하고 나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나라였기에
속으로 울면서 노르웨이를 선택하게 됩니다.
노르웨이 이민자 1호가 됩니다.
호텔 벨 보이, 서류심부름, 잡역부, 화장실 청소부 등등 전전하게 됩니다.
새 먹이 빵과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얻어와 찬물에 부풀려서 빵죽을 만들어 연명했습니다.

배고픔의 서러움 때문일까?
그는 최고의 요리사를 꿈꾸었습니다.
“ 다른 사람이 그릇을 스무 개 닦을 때 저는 오십 개 닦았습니다.
남보다 더 깨끗하게 반짝 반짝 닦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접시하나, 스푼하나 놓아도 반듯하게 놓았고 마음으로 정성껏 했습니다. 그런 성실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되나 봅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호텔 주방장이 그를 요리전문학교를 보내 주게 됩니다.
이것이 기회가 되어 라면 개발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국 라면 세 박스로 시작했습니다.
라면을 마켓에 소개할 때 사람들은 “걸레 같다” “때밀이 돌” 같다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노르웨이 음식은 국물이 없는 음식을 즐기는 문화입니다.
그러기에 물만 붓고 끓여서 먹는다고 하는 설명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인간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수프를 개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홍보를 했습니다.
그 성실과 정성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첫 주문이 들어 왔습니다. 3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현재 Mr Lee 라면은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노르웨이 라면 시장에서 Mr Lee가  78%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 2,500만개의 Mr Lee가 팔렸습니다.
450만 노르웨이 사람이 각자 6봉지씩 끓여 먹은 계산입니다.
연간 2천 500만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노르웨이 초등하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됩니다.
지금 노르웨이 수상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이철호입니다.
그는 키가 160㎝로  키가 작습니다.
얼굴도 볼품이 없습니다.
그의 모습은 가난에 찌든 모습입니다.
다리도 절었습니다.
스스로고 말하기를 나는 “열등감 종합세트”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면 그런 나를 품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입니다.
따스하고 인자한 냄새가 풍겨나는 얼굴입니다.

그의 경영 철학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관계가 사업의 기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긍정이 없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둘째가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포기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도전을 할 수 없습니다.
셋째가 정직과 성실이 최고의 상품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라면을 팔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품을 팔았습니다.

그는 열등감 종합세트가 아니라 격상 높은 상품으로 자신을 팔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의 외적 업적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굴곡 된 삶입니다.
절망적이고 파괴적이고 온갖 황폐한 빈들 같은 곳에 버려진 삶입니다.
그런 속에서 견디고 헤쳐 나오면서 다음어진 정신과 마음
그리고 그의 인품이 그렇게 다정스러울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이 산다는 것은 거저가 아닐 것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
우리가 살면서 더 이상 불평 원망 없기입니다.
더 이상 팔자 타령하면 한 맺힌 삶 사는 것 없기입니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수많은 시련과 아픔이 꼭 우리를 파괴하는 나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헤쳐 나가는 모습
분명 절망적인데 빛으로 사는 모습,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인데 환하게 웃으며 이겨 나가는 모습,
가난으로 고통스러울 텐데 오히려 더 어려운 사람을 염려해 주는 모습,
여전히 신뢰와 정직 그리고 성실로 살아가는 모습 등등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랍니다.

그런 마음,
그런 정신,
그런 인품이
내일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우리 어떤 시련과 아픔이 있을 지라도 이겨 나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1. 7. 29. 11:10

노후의 아름다움

황혼의 붉은 노을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백 동흠목사

어제 주일(2011년 7월 17일)은 저희 교회에서 참 뜨겁고 인상 깊은 날이었습니다.
예배의 시간에 단기 선교 파송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60대 후반인 임원희 목사님과 80이 훌쩍 넘은 John 장로님이
한 달 예정으로 한국 선교의 길을 출발하는 날입니다.
경상남도 남단에 있는 도서 지방인 남해도로 가서
어느 교회를 중심으로 영어 교실을 열어 영어를 가르치며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기 위함입니다.

감리교회에 찰스 멕코이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에 와서 선교보고 후 선교 지망을
호소했습니다. 청중이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때 담임 목사인 멕코이 목사님이 이 나이에 괜찮겠습니까?
물으면서 손을 높이 들고 일어 난 것입니다
71세의 나이었습니다. 그 후 주님의 부르시는 날까지 중국에 가서
아편 중독자들을 위해 건강하게 섬기다가 86세의 나이에 소천 하셨습니다.
15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77세에도 선교지에서 열심히 봉사하다 그 해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70세에 주한 유엔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에디슨은 80세의 생일 축하하는 자리에서
“난 지금도 5시간만 자고 연구실에서 보내고 있다.” 고 했습니다.
지미 카터는 퇴임 후 13번째의 “노령의 미덕”이란 책을 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퇴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로 돌아다니며 사랑의 집을 지어 주고 있고
지금도 125명 나오는 고향 조지아주의 자신의 교회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주일 학교 교사로서 봉사 하고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성인발달 연구소는 행복한 노후의 삶을 위한 리서치를 했습니다.
1910년대에 태어난 평범한 사람들과 1920년대에 태어난 사회적 혜택을 받은 사람들과
1930년대의 출생한 보스턴 빈민가의 사람 총 800여명입니다.
연구 결과 노후의 행복은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관리 능력과 이타적인 사랑의 소명적 가치였습니다.
85세에 불후의 명작 “아베마리아”를 작곡한 쥬제페 베르디는
나를 건강하게 이 나이까지 오게 한 것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임 목사님과 John 장로님
주일 오후 LA 공항으로 떠나가는 두 분의 모습이 어떤 젊은이보다 더 젊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조금도 피곤한 모습이 없이 너무 밝아 보였습니다.
아마 선교적 소명가치와 영혼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두 분,
임 목사님과 Jonh 장로님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노후는 황혼의 슬픔이 베어 있다고 합니다.
외롬과 쓸쓸함, 그리고 어둠과 비애라고 말합니다만
아닙니다.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무는 황혼의 태양은
더 아름답고 더 찬란하게 온 통 붉은 노을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가시는 두 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황혼의 아름다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외쳐 주었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1. 7. 29. 11:06

거짓 기억③

행복해 지려면 거짓 기억을 추방해야 합니다.③

백 동흠목사

거짓 기억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충격적 상처를 근거로 파생되어 나타난 기억의 조각들이
모두아저 만들어 낸 허상입니다.

요즈음의 자녀들은 참 좋은 조건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가난보다 훨씬 더 부요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상처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과 관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절망적 상황보다 훨씬 더 좋은 희망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조건에서 자라는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불행하다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미움의 관계, 원망의 관계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거짓 기억이 숨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기억을 추방하고자 한다면

첫째는 거짓 기억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거짓 기억의 실체가 얼마나 지엽적이며 부분적인데서 파생되어 나온
허상인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둘째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과 기억이 살아 나오게 해야 합니다.
대부분은 거짓 기억은 과거의 충격을 통해 내 안에 형성된 것이 때문에
기억 속에 강하게 살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만이 전부가 인 것 같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러 주고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 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는 어쩜 이것이 사탄의 전략일 수 있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항상 마귀는 거짓의 영입니다. 예수님은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사실에 근거해서 거짓을 뿌리는 존재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을 근거로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하고 한 것은
사실에 근거하여 거짓을 확대하여 뿌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행과 파멸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예수님도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린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정 행복한 삶으로 살고자 한다면 거짓 기억의 실체의 허상을
알고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요즈음 우리 자녀들은
몸은 장대한데 체력은 약합니다.
정신은 유약하여 시련에 약합니다.
다들 유능한데 유용성은 부족합니다.
지나치게 이기적이라 대인관계가 취약합니다.
영적으로 너무 허해서 너무 쉽게 거짓의 기억에
눌려 적대적 감정과 원망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혹 어른이 된 나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나
스스로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어쩜 지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습니다.
우린 지금 충분히 행복에 겨워 감격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거짓 기억을 추방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으로 가득한
우리 가정과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갈6:7)

백동흠 칼럼 2011. 7. 9. 06:00

평창의 협력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평창의 협력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백 동흠목사

협력은 상생(相生)의 힘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 라는 책에서 이규택씨는 한국인의 모습을
독 속의 게로 비유했습니다. 독 속의 게, 하나하나는 독 속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역량이 있답니다.
그런데 나오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게 하나가 나오려고 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의 모습은 이전의 한국인의 모습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한 모습을 볼 때
참 아름다운 협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반에서의 처음 분위기는 독일의 뮌헨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틈인가 분위기가 반전됐고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으로 결정됐을 때의 감격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습니다.

평창 프레젠테이션(PT)은 '새로운 지평(New Horizons)'이란 슬로건 아래
명분과 실리, 꿈과 감동으로 전해 졌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도 모두가 "탁월하다(excellent)"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외신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 어린 지지 호소와
2010년 피겨스케이팅 챔피언 김연아의 인상적이고 매끄러운 연설,
입양아 출신인 미국 스키 스타 토비 도슨의 스토리까지
평창 프레젠테이션은 한 편의 잘 짜여 진 드라마 같았다'고 평했습니다.

협동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나타납니다.  
두께 2인치, 폭 4인치의 각목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무게가 167k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각목 두 개를 접착제로 붙이거나 못을 박아서 사용하면
334 kg(167×2) 이 되는 것이 아니라 2,212kg의 무게의 힘이 나온다고 합니다.  
3개를 함께 묶어서 사용하면 3,345kg을 감당하게 됩니다.

10마력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실린더 엔진 8개를 연결하면
80마력(10×8) 나올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285 마력의 힘이 생산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무서우리만큼
협력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돌자고 할 때 모두가 함께 돌아 주었습니다.
조용하자고 할 때 모두가 함께 조용했습니다.
외치자고 할 때 모두가 함께 외쳤습니다.
마음을 모아주고 뜻이 하나 되고 정신이 일치가 될 때
물질적 환경, 물리적 철옹의 성이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대한 성벽도
무너지게 하는 것이 협력된 정신력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가 되면
경영하고자 하는 일을 못 할 것이 없으리라(창11:6)
옛말에도 “삼인동심 황토변금(三人同心 黃土變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마음이 하나 된다면 황토도 변하여 황금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평창 주민 400여명이 자비를 들어 더반의 현장에 와서 마음을 모았습니다.
IOC자체의 조사 결과 독일이 50%의 지지의 뜻을 보여 주고 있을 때
한국국민의 87% 와 평창은 92%가 지지의 뜻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을 움직이자고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왜 우리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이 드시는지요?
평창의 모습은 “우연”이 아니랍니다.
아름다운 협력이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 안에도 협력의 덕목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참아주고 조금만 인내하고 서로를 존중해 주고
뜻을 따라준다면 그래서 서로 협력하여 준다면
우리의 가정도 평창의 아름다운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꼭 우리의 가정은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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