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3. 6. 18. 08:25

충동구매와 사탄의 전략

충동구매와 사탄의 전략


                                                     백동흠목사


마켓에서는 분명 이유와 명분이 있어 장바구니에 담아 물건을 사옵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 막상 꺼내다 보면 금방 후회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성을 뛰어 넘어 충동구매의 현상입니다.

매장에 독일 술과 프랑스 술을 나란히 진열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멋있는 노래를 틀어 놓으면 독일 술이

프랑스의 음악을 틀어 놓으면 프랑스의 술이 더 많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감성적 충동구매 현상입니다.

매장에서 제품의 소개서를 전해 줄때 가볍게 스킨십을 하게 되면

제품 구입에 더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

식당의 종업원이 계산서를 건넬 때 미소를 지으며

밝은 인사를 한 마디 하면 훨씬 더 많은 팁을 받는다는 것

이런 현상을 통해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식보다 무의식에 의해 쉽게 지배당한다고 합니다.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김헌식)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첫째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둘째는 그러나 이성적인 것 그 이상의 것에 의해 행동하고 선택한다.

셋째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실험한 결과 보이지 않는 감성에 의해

뜻밖의 것을 선택하는 측면이 강하다


이런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런 인간의 현상을 교묘히 이용하여

인간을 타락으로 몰아 간 것이 사탄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탄은 아담에게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하와에게 먼저 접근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이 더 감성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한 것이 하나님같이 된다는

더 멋있고 더 아름답다고 하는 감성적 충동입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게 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앎”이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이미 분위기와 상황이 충동구매의 현상으로 몰입된 상태입니다.(창3:6)

“먹음직했다.”

“보암직했다.”

“탐스러웠다.”

이것은 이성이나 의지와 상관없는 감성적 충동현상의 표현일 뿐입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사탄의 전술은 놀랍게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즈음 아담에게 있어서의 하와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이미 아담은 하와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이성이나 의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와의 표정과 눈빛은 이미 아담에게 충동구매의 현상으로

몰입되게 하고도 남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결과는 뻔 한 것이었습니다.(창3:6)

그리고 이성으로 돌아 왔을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과의 조지프 시몬스 교수도

“인간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성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판단하고 행동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는 순간적으로 충동구매 현상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성적 충동으로 음란하게 하고 순간의 충동현상으로

혈기를 부려 살인으로 몰아가고

순간의 충동현상으로 자살을 부추기기도 하고

순간의 충동현상으로 이혼으로 몰아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저는 그러기에 영성 훈련을 평소에 하자는 것입니다.

문을 닫는 훈련을 통해 사탄의 충동현상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과

골방으로 들어가 오직 주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훈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했습니다.(롬12:2)

사탄의 심리적이고 감성적 충동에 휘말려들지 말고

영성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강하게 나타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탄의 전략이 강하게 득세하는 종말의 때

내가 살고 자녀들이 살고 나의 가정이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3. 6. 15. 06:56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현장을 보면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를 보며


                                      백 동흠목사


4월 15일 월요일인

어제는 이상하게 마음이 참 심란했습니다.

마음이 자꾸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왤까?

세계적 가수로써의 샤이의 젠틀맨을 보고

지나치게 도색적인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한 것일까?

한국의 국회에서 동성애법을 통과한 것에 대해

성령의 탄식이 있는 것인가?

왜 이리 마음이 심란한 것일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답답하여 무작정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 영이 미국을 위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후에 인터넷을 통해

보스턴 마라톤 대회 폭탄 공경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3명이 사망

140여 명이 부상

현장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요즈음 계속

이 땅을 지키는 파수꾼에 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지켰던 그 땅을 지켰던 므드셀라를 사모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삼상7:13)

그렇게 이 땅을 사탄의 세력과

악의 충동 세력에서 막아 주시도록 하게 하는

그 한 사람 사무엘을 그리워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메일 하나를 받았습니다.

흘러 신학대학에서 온 메일입니다.

세미나가 있으니 오시리라는 내용입니다.

세미나 제목이 “탈 기독교 시대의 목회 사역”입니다.

지난날의 화려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던 교회와 기독교가

지금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세미나 안내었습니다.

꼭 참석하고 싶은 세미나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지금은 화려한 귀족풍의 대형 교회도

수많은 교세와 번영도

그리고 풍요로운 축복과 명품도 다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지금 교회의 흐름은 주변으로 자꾸 밀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꾸 “악화” 되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청빈과 청결한 맑은 영성의 소유자가 필요합니다.

이 성을 사하게 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그리운 시기입니다. (렘5:1)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그 한 사람이 필요한 때 입니다.(대하7:14)

이제는 어떤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말고

화려한 이벤트성 행사에 의존하지 말고

종교적 의식 안에서만 숙달된 모습으로 보이지 말고

실제로 삶과 인격이 그 생활의 현장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가 있으면 우리 모두가 살고

그가 없으면 우리 모두가 죽을 만큼 그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대가 그 한 사람이 되어 주지 않을런지요? (13.4.16)



백동흠 칼럼 2013. 6. 14. 00:07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셨는지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았는지요?

 

                                       백 동흠목사


요즈음의 대세는

그저 단순하고 웃기거나

굉장한 자극적인 액선 영화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현대인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미제라블은 2시간 30분짜리 영화입니다.

그리고 옛날 중세의 무대이고

내용도 고루하고 뻔 할 것이고

분위기도 굉장히 무겁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시간 30분 내내

나의 의식을 사로 잡아갔습니다.

내용이 아주 단순 단순하게 이어져 나갔습니다.

대사도 노래도 너무나 쉽게, 쉽게 이어져 갑니다.

그런데 마음에 감동이 전해집니다.

장발장의 강직한 진실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가난한 민중을 위해 정의 편에 선 젊은이들의 모습도

참 밝고 화사했습니다.

코제트을 향한 마리우스의 사랑도

마리우스를 향한 에포닌의 엇갈린 사랑도

그리고 수양 딸 코제트을 위해 장발장의 희생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노래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을 포기 하고

가난한 민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마리우스와

그를 살려내어 코제트에게

그의 사랑 마리우스를 선물하고 떠나는 장발장의 모습도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정의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모두 살아 나와 프랑스의 삼색기를 흔들며

바리케이드 너머

저 건너편, 내일에 대한 희망을 선포할 때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 이란 것을 흘렀습니다.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리케이드 건너편에 있음을 보여 주므로

역사는 시련과 고난에 대해 응전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장엄하게 보여주는 한편의 시 같았습니다.


어둠은 끝나고

태양은 밝아 온다.

우린 주님의 뜰 안에서

자유를 누리리라

사슬은 끊어지고

총 대신 쟁기를 들리라

그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와 함께 가자

그대가 염원하는 세상이

저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네!

민중의 소리 들리는가?

저 멀리 북소리 들리나?

내일과 함께 미래는 시작되지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오리니…….



백동흠 칼럼 2013. 6. 13. 23:03

나눔이 있는 곳에 행복이 시작됩니다.



나눔이 있는 곳에 행복은 누려집니다.


                                                 백 동흠목사


나눔은 풍요로운 행복의 시작인 것을 아시는지요?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 때,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성령의 감화가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까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는데,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록펠러 재단을 통해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눔은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반면 욕심은 불행으로 가는 길목이 됩니다.

사람은 죽을 때 아쉬워하는 것 3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과

둘째 좀 더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과

셋째는 좀 더 나누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작고 많음의 소유가 행복의 기준이 아니랍니다.

얼마큼 나누는 삶을 사는가가 행복의 기준이 됩니다. 


백동흠 칼럼 2013. 2. 12. 08:10

새해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백동흠목사 

조급증은 말세의 증상입니다. 
성경은 말세의 고통중의 하나는 조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대에 미래학자 토플러는 미래의 현상 중에 하나는 조급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자와 약자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가 대신 할 것 라고 했는데 
오늘에 와서 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빨라야 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고속화되고 즉석화 되고 경쟁화되고 있습니다. 
냉장고도 급속 냉각이어야 잘 팔립니다.
선거도 투표와 함께 출구 조사를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복권도 즉석 복권을 많이 사고 술도 폭탄주를 원합니다.
남녀의 만남도 번개팅을 선호합니다. 
식용 동식물도 성장 호르몬을 집어넣어 조급한 성장을 원합니다. 
정보도 “누가 먼저 아느냐”가 힘, 능력 성공의 기준이 되고 
모든 전자 제품도 어느 제품이 속도가 빠른가를 묻고 있습니다. 
인터넷도 1,2초 단위로 인터넷 회사의 운명이 사활이 바뀝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세의 증상에 불과 합니다. 
말세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이것이 “고통”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런 것과 상관없이 흐른다는 사실입니다.
산모는 잉태한 후 10개월을 넉넉히 기다려야 건강한 아이를 출산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린 후 추수의 때를 기다려야 풍성한 열매를 거둡니다.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때를 기다려야 아름다운 나비로 변형됩니다.
생명은 기다림을 통해서 완성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요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느린 것이 아닙니다. 서둘거나 조급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경륜이고 법이고 질서입니다.
기다림은 낭비도 소비도 아닙니다. 
기다림은 희망이며 창조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고 요셉은 27년을 기다렸고
모세는 40년을 기다렸고 다윗은 13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줄 아시는지요?

첫째는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에 대한 약속의 신실함을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희망을 가졌기에 오늘을 여전히 성실히 주어진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희망을 성취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새해에는 희망을 품고 한 알의 약속의 말씀을 
오늘이라고 하는 터전위에 뿌리고 물주고 가꾸고 흙 북돋아 주면 
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 조급하거나 안달하지 말고 입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주님의 방법으로 실현 시켜서 우리에게 안겨 주실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새해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3. 2. 12. 08:06

세월의 끝자락에 서서

 

세월의 끝 자락에 서서 

                      백동흠

세월의 끝자락에 서서 
오늘 여기를 보면 
순간의 경점이 아닌가?

이렇게 
지내 놓고 나면
별일들 아니련만

오늘
여기가 영원인 양
괴로워하는

인생의 우둔함이 
여기에 있네! 

산다는 것은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이라면

세월의 끝자락에서 
오늘의 순간을
바라보며

단순하게 비우며 
사는 삶 
배워 봄이 어떠한지…….


****
올 한해도 푸른 편지를 사랑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당시에는 슬퍼 보여도 지내 놓고 나면 
다 아름다운 추억일 뿐 입니다. 

감사 합니다. 
사랑 합니다. 
진짜로유....^^ 

백동흠 칼럼 2012. 12. 29. 00:31

어둡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어둡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백동흠목사 

크리스마스의 절기에 
산타 모니카 해변을 종종 갈 때 마다
크리스마스 조형물이 푸른 공원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참 좋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품고 있는 마리아와 
지긋이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요셉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이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모습
양치는 목동들과 몇 마리의 양들이 
아기 예수를 쳐다보는 순박한 모습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즐거움을 주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무신론자들이 공공의 장소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전시하는 것은 정교 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항의 했고 산타 모니카 시 당국은 결국 21개의 지역으로 나누워 
2개의 지역만 기독교 조형물을 세우게 됐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조형물을 세운 산타 모니카 크리스마스 준비 위원회에서는 
항의 법안을 냈지만 기각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낳아가서 조형물만 세우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결국 그나마 2개 지역의 크리스마스 조형물 자체도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세울 수 없는 지경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역의 교회 성도님들이 서로 앞 다투어 인간 조형물이 되어 주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감동이 되고 감격이 되는 현장이 된 것입니다. 
친히 마리아, 요셉이 되어 주고 
동방의 박사와 목동이 됨으로 살아 있는 크리스마스의 현장을 
재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감동과 은혜의 물결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저도 꼭 한번 가보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와 아기  예수를 지우려고 하는 어둠의 세력인 무신론자들은 
미국 전체 인구의 1.6%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세력이란 허상에 불과 하답니다.
그러나 이런  세력의 실상을 방관하거나 무시하다 보면
어느 틈인가 어느 순간 거대한 골리앗으로 다가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병사와 사울 왕 조차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전의를 상실하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 
골리앗의 실체를 부셔 버린 다윗 같은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산타모니카의 조형물 사건을 목격한 
러셀 무어 남 침례교 신학교 학장은 
“크리스마스는 앞선 모든 세대와 같이 우리가 깊은 어둠의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킨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비추인
성탄의 빛을 어두움이 이길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제 23일 성탄 주일은 잘 지내셨는지요? 
성탄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만이 드러나는 은혜로운 성탄 주일을
저도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24일 저녁에도 성탄 촛불을 밝게 비추이면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몹시 어두운 세대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2. 12. 29. 00:22

샌드 훅 초등학교의 슬픔을 당한 가족을 생각하며... 성탄 사랑을


샌드 훅 초등학교의 슬픔을 당한 가족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

성탄 사랑 

              백동흠

아무리 어둠이 
짙게 깔려도
오히려 그 빛은 
더욱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이 
아무리 짐승우리 같이 
외면하고 거부해도

여물통 
빈자리만 있으면 
그 사랑은 
그렇게 다가와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같이 
어둠이 짓누르며

흑암의 땅
사망이 깊게 
짙게 깔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어둡기에 
그 빛은 더욱 밝게 비추이고  

짐승의 우리  
여물통이기에 
그 사랑은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초등학교의 총기 참사 사건으로 인한 아픔입니다.
이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절기에 빚져진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 무엇으로 위로가 될까요?
위로 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기에 빛은 더욱 빛나게 되어 있고 
절망스럽기에 희망은 더욱 귀한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이 그의 사랑은 냉대하고
등 돌려 짐승의 우리, 여물통 일지라도  
그 사랑은 넉넉하게 다가와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고 
너무 아프고 슬픈 마음이지만 
그 사랑은 그 아픈 마음에 
더욱 아름답게 피어 날 것입니다.

슬프지만 웃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어둡고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그 빛은 더욱 어둠을 밝힐 것이며

그 사랑은 짐승우리 같은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꽃 피어 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2. 12. 19. 07:12

미 초등학교 총기 참사 - 슬픈 성탄절기

 

미 초등학교에서 총기 참사가 일어 났습니다. 이 성탄의 절기에....

                                                        백동흠목사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5)

이 성탄의 절기인 14일(금) 코네티컷 주의 뉴타운 시의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총기 참사 극이 벌어 졌습니다.
14일(금) 오전 9시 30분에서 38분 사이에 일입니다.
20대 앳된 청년이 학교에 들어와
6-7세의 어린이 20명과 그 학교의 선생님들 6명
총 26명의 사람을 죽었습니다.  
이미 집에서 이 학교의 교사인 엄마를 사살 한 뒤였습니다.  

전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는 순간 충격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아! 인간의 죄성이 이렇게 악하고 비참하게 하는구나!
그리고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피지도 못하고 시들은 어린 영혼들과 그의 가족을 생각할 때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위로 받을 길 없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주님 밖에 없어요.”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제 안에서 상한 영의 탄식을 뚜렷이 들을 수 있습니다.  

아! 이럴 때, 정말 이럴 때
미국이 신앙의 바탕위에 선 나라라면
대통령이 그 하나님 앞에 온 백성과 함께 나아가
하나님을 구하면 얼마나 좋을까
영의 생각이 탄식하며 흘러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 미국의 이런 비극적인 참사와 아픔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그의 보내신 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야 한다고.

이제 우리가 구할 것은 물질도 아니요 복지도 아니고
도덕성의 회복이라고 호소하면서  
이 도덕성의 회복은 오직 예수님의 속죄에 기초해야 한다고
외쳤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영의 탄식이 막 흘러나옴을 느끼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떠오른 것은 한 기석 성도였습니다.
참 신실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경조사를 꼭 챙겨 주셨다고 합니다.
10월의 하리케인 샌디 때 많은 수재민들 많이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뉴욕의 지하철역에서 어떤 승객을 괴롭히는
흑인 청년을 만류하다가 그 흑인 청년이 밀치는 바람에
철길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기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40초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때 이곳에 8명 이상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난간을 붙잡고 올라오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이 모습을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차갑습니다. 오직 무관심이며 냉정의 윤리 일뿐입니다.
그 다음 날 이 사진이 신문에 났습니다.
차마 잔인했습니다.
슬픔을 당한 가정을 생각하면 이럴 수 가 없는 처사입니다.
너무나 비도덕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의 현주소임을 느끼었습니다.

착한 성도가 그렇게 남을 도와주다가
도움 받을 길 없이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합니다.
아! 40여초 여유!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래서 손을 내밀어 주었다면 안타까워하며 하염없이 흐느끼었습니다.
이 땅에서 위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나의 영과 더불어
그렇게 탄식하심이 느껴졌습니다.
위로 받을 길이 없는 이 땅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의 음성이 내 안에 메아리쳐 왔습니다.

지금 우리 목사님들과 영적 지각이 있는 성도님들은
오늘 우리 세대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아의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겸손히 말씀을 드려 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렘 8:18)

망하는 흐름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며
그렇게 몸부림치며 아파했던 그 예레미아의 마음 말입니다.

위로 받을  길 없어 그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이 땅의 신실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위로 내려 주세요.
그리고 이 세대의 이 땅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기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슬픈 성탄의 절기인 것 같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2. 12. 8. 12:58

성탄 - 대망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날로 지켰으면 합니다.

 

성탄 - 대망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날로 지켰으면 합니다.

백동흠목사

지난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시작한 이래로
1912년 발칸 전쟁,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
1950년 한국 전쟁
1960년 월남 전쟁, 중동 전쟁,
1970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과 이라크간의 8년 전쟁,
1980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간의 포클랜드 전쟁,
1990년 걸프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보게 되면
1차 세계 대전으로 사망자 8백만 명이 사망했고
2차 대전으로 전사자 5천만 명,
한국 전쟁에서 25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기타의 전쟁과 테러와 혁명과 재해로의 죽음을 포함하면
자연사 아닌 죽음이 20세기 100년의 기간에 9억의 사람이 살상됐다고 합니다.

인간의 역사 3421년의 기간 동안에 전쟁이 없는 기간은 286년에 불과했습니다.
인간 역사의 90%가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죽음도 자연사가 아니었습니다.  
형 카인에 의한 아우 아벨의 살인 사건이었음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쟁의 행위는 하나님을 떠난 카인의 문명권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전쟁 행위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저지른 가장 무서운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폭력적인 전쟁 행위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개입이 스며 있음을
성경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요1서 3:12)
그리고 인간은 미래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쟁의 역사를 이어 갈 것입니다.(마24:7)
핵을 만든 아이슈타인도 “사람이 있는 한 전쟁은 계속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탄은 대망의 메시야의 성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메시야는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 경제 군사적 메시야를 예수님께 기대했으나
오신 메시야는 수난의 종으로 무기력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사망을 위해 친히 대속하여 죽어 주시고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심으로 십자가상에서 승리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어둔 세상
전쟁으로 창궐한 사망의 땅에
오직 복음의 선포만을 부탁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내가 다시 온다”

대망의 메시야는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전쟁을 종식 시킬 것이며
그의 나라 그의 통치를 실현 시킬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통치하는 역사적으로 실현될 천년 왕국을 믿습니다.
그 분은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즈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 땅에 있어야 합니다.(계6:10)

이제 우리들의 성탄은
대망의 메시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쟁기)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사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