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0. 10. 23. 05:32

밖이 추운 것이 아닙니다.



밖이 추운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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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동흠목사

“산골에 어둠이 내렸다.
촛불 하나 밝히니 그대 얼굴이 선하구나.
산꼭대기는 달빛이 길을 잃지 않을 만큼 비추고 있으리라.
짐승들이 둥지로 속속 돌아갈 시간.”
임의진님의 “촛불하나”라는 시입니다.

저는 아주 어린 시절 외가에 갔을 때 늦은 시간까지 호롱불하나 켜 놓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밤늦게 까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던 그때의 느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구수하고 정겹고 따스하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종종 촛불을 켜 놓고 식사도 하고 예배도 드리곤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조용히 대화를 하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쉼을 누리고자 할 때
촛불은 아늑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내곤 합니다.

촛불을 밝히면 마음들이 안으로 모두와 집니다.
그리고 차분해 지면 평온해 집니다.
촛불 아래서 비추이는 얼굴들은 따스하고 착해 보입니다.
나누는 대화마다 구수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신 나게 합니다.
촛불 앞에 앉아 있으면 사색의 뜰을 거닐게 하며 안으로 깊이를 더하게 합니다.
홀로 있어도 고독하지 않으면 어둠속에서도 희망을 보게 합니다.
어둠을 태우는 빛의 모습은 부드러우나 강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인의 문화는 전기불의 문화입니다.
밤의 안식을 주기보다 대낮같은 밝음 속에 낮의 삶을 연장케 하는 문화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곧 바로 TV를 켜야 합니다.
핸드폰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만의 공간으로도 침투에 들어와
우리의 대화를 빼앗아 갑니다.
저마다 갖고 있는 컴퓨터는 각각 개인을
또 다른 사이버의 공간으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함께 하면서도 관계는 단절 되여 있고 밝은 전깃불 아래서
영혼은 어둠의 그늘아래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덩그러니 썰렁한 이불을 덥고 하루를 마감할 때
몸이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추운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어둡고 외로운 추운 밤을 지내고 있다고 생각이 드시지 않는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헤진 영혼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영혼이 피곤하구나. 너무 바쁘게 살았구나.
얘야, 오늘 이 밤에는 TV의 플러그를 빼렴.
그리고 컴퓨터의 스위치를 끄고 밖으로 향하는 전화의 선도 끊어 보렴.
그리고 영혼의 촛불을 키고 그 앞에 조용히 앉아 보거라.
너 나의 임재 안에서 결코 외롭지 않음을 알게 해 줄게”

아!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밤이 깊어 가는 계절에 밖이 추은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촛불 하나 킬 마음의 여유가 없음이 추운 것이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0. 10. 1. 09:38

목사님도 실족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도 실족할 수 있습니다.

                                          백 동흠목사

14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방언을 하는 성령파 목사로 5중 복음을 외쳤습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000만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미 복음주의 협의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총재직을 수행했습니다.
Time지가 선정한 미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25명의 목회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는 평소 중보기도와 영적 전쟁의 원리를 가르쳤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죄 중에 하나가 게이이며 레즈비언인 동성연애임을
분명이 지적해 줌으로 복음주의 신앙의 울타리 역을 했고
많은 성도들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자녀를 둔 정상적인 행복한 가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런 그 목사님이 3년 동안 동성애자로 살았습니다.
이 일이 드려났을 때 미국의 교회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 교회의 영적 토양은 그 질이 격하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회의를 품으며
교회를 등지게 했고 미 교회에 대한 사회적 냉소주의가 퍼지게 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몇 가지 다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말세에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안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믿는 자라도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벧전5:8)

둘째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까이서 모신 베드로도 사탄에게 밀 까부르듯 당했고(누22:31)
가룟 유다도 마귀에게 속아 멸망으로 갔다면(마27:5)
얼마든지 우리도 실족할 수 있고 사탄에게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기에 더욱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솔직히 죄를 죄로 고백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너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죄를 담당하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을 만큼 오염됨 자식들입니다.
우리의 체질이 이미 죄성과 악성과 음란 끼와 교만 끼가 체질같이 배어 있고
마귀의 충동질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온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해도 내 안에 위선과 이중성이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런 나의 모습을 합리화하며 의인화시키기보다
솔직히 그 하나님 앞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상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이것이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담임하던 그 교회에서 떠나면서 마지막 설교시간에
눈물어린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한 모든 것은 저의 진실이었고
그런 삶을 살고자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나 내안에 음탕함과 혼돈의 세력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었고 나는 여전히 주님이 필요했습니다."

최근 한국의 젊은이 교회로 유명한 교회, 인기있는 유명한 젊은 목사님의
성추행사건의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나서 적어 보았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0. 9. 28. 03:19

혹 그대는 카인의 신앙이 아닌지요?



혹 그대는 카인의 신앙이 아닌지요?

                                      백 동흠목사

카인의 비극은 “단절된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카인에게 물었습니다.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4:9)
카인의 답변은 차가웠고 냉정했습니다.
“난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 이니까?”

아니오,
카인은 아벨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지키는 자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난 알지 못 합니다”라고 함으로 무관계를 선언했고
“내가 왜 지키는 자 입니까?”라고 함으로 무책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는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카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 되여 있었습니다.

외면함으로 외면당하며 거부함으로 거부당한
카인은 사람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홀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배의 행위는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카인의 신앙”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인생은 홀로 일수가 없답니다. 결코 홀로는 아니랍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각기” “저마다” 홀로가 되어
벽안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느낄 때마다 왜 이리 마음이 아픈지  
“아- 이게 아닌데...”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혹 그대는 카인의 신앙의 소유자인지 물어 봅니다.

백동흠 칼럼 2010. 9. 17. 08:08

스트레스에 대한 원숭이 실험이 주는 교훈을 아시는지요?



스트레스에 대한 원숭이 실험이 주는 교훈을 아시는지요?

                                                                               백 동흠목사

참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원숭이들을 모아 놓고 한 실험입니다.
보스 원숭이의 의자와 책상이 있고 그 나머지 네 마리 혹은 다섯 마리의 원숭이도
각각 의자가 있는 책상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들이 앉은 의자에 전기쇼크가 오도록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측된 시간 없이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오게 했습니다.
원숭이의 보스의 책상이나 다른 원숭이들의 책상에도 똑같은 벨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의 책상의 벨은 누르면 전기가 끊어지는 장치가 되어 있고
다른 원숭이들의 책상의 벨은 아무리 눌러도 소용이 없게 해 놓았습니다.
전기가 들어 가면 모든 원숭이들이 의자에서 고문을 당하는 형편입니다.
이때 책상의의 벨을 누르도록 하는 실험입니다.

하루에 6시간을 괴롭게하고 6시간을 휴식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9일이 채 안돼서 보스 원숭이는 죽었고 나머지 원숭이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습니다. 보스 원숭이의 육체적 사인(死因)은 위궤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위궤양의 원인은 스트레스였다고 했습니다.

보스원숭이는 어느 틈엔가 알게 됐습니다.
내가 빨리 벨을 눌러 주지 않으면 다른 원숭이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 후 벨을 주시하며 극단의 긴장감으로 자신을 곤두세웁니다.
반면 다른 원숭이들은 아무리 벨을 눌러도 소용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긴장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과는 똑같은 전기쇼크를 똑같은 양으로 받았는데
보스 원숭이는 정신적으로 견디다 못해 죽었고 다른 원숭이들은 죽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자 브랜디(Brandit)의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은 별반 문제가 없다는 것과 
반면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에 절대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보스 원숭이같이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속에
스스로 극단의 긴장감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지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도 전에는 보스 원숭이 같이 교회의 목회자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스스로 불안해하며 극단의 긴장감속에 산적이 있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눌리며 살았는지 지옥을 경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조용히 마음을 비워 놓고 영성 훈련을 한 후부터 놀라운 변화를
내면으로부터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저의 경험을 고백 드린다면

첫째는 그 원숭이의 보스의 자리가 제 자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직 나의 주인님이 되신 예수님께 그 자리를 넘겨 드리고
나 자신은 자꾸 비웠습니다.

둘째는 수용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실패도 아픔도 상처도 괴롬도 그냥 편하게 넉넉하게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원숭이들이 아무리 벨을 눌러도 소용없음을 체득한 후 더 이상 스트레스를 안 받고 전기 쇼크를 그대로 수용한 것과 같은 이치었습니다.
화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원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항상”입니다. “범사에” 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내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주여!! 하고 부르면 마음이 금방 영으로 스며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영의 생각은 항상 평강과 생명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단순하게 본질을 찾아 갔습니다.
뭐 별것도 아닌데……. 라고 말하며 툴툴 털어 버리고 피해가고 넘어가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주님 앞에 서면 인생, 자체가 다 불쌍해 보일 뿐 입니다. 
오직 주의 자비와 긍휼를 구해 드리고 싶음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진짜입니다.)

죽음으로 스스로 몰아간 보스 원숭이의 그런 과오를 범하지 말고
스트레스 없는 정신과 육체를 갖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백동흠 칼럼 2010. 9. 9. 03:15

에벨탑 효과(Eiffel Tower Effect)에 대해 알고 있는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루에 3만명 1년에 650만명 찾는 에벨탑은 현재까지 올라간
         사람이 총 2억명이라고 합니다. 
네 변이 125m 로 정확히 
         동서남북의 네 기둥으로 세워졌습니다. 높이는 320m입니다
.


에벨탑 효과(Eiffel Tower Effect)에 대해 알고 있는지요?

                                                                백 동흠목사

스텐포드, MYT, 카네기멜론대학의 연구팀의 연구의 발표가 재미있습니다.  
미모의 톱스타를 고용하여 광고한 광고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에
대한 연구 보고입니다.
시청자의 시선과 뇌파 그리고 중추신경의 활성화와 피부전도도 반응 등을
과학적으로 측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 시청자들의 시선은 아름다운 모델에게 약 80% 이상
집중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제품이나 브랜드, 메시지 등에는 전달 효과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결론은 많은 돈을 들여서 광고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왜 광고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반복효과”라고 합니다.
반복을 통한 각인 현상이 구매율에 대한 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이 존크는 12명의 사진을 준비해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실험 결과 사진을 자주 보고 많이 본 사진에 대해 호감도가
높아진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도 말합니다.
에펠탑을 파리에 세울 때 파리 문인, 예술인, 시민들은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1만 8,000여개의 금속과 250만개의 나사못으로 연결시켜 7,000 t의 철골구조물을
파리의 한 복판에 세운다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파리 예술에 대한 모독이며 고풍스러운 파리 분위기를
망쳐놓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300m 가 넘는 에펠탑을 눈만 뜨면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서
시민들의 호감도가 높아지게 되었고 지금은 파리의 명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IBM, 포드, 제록스, HP 등을 담당했던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저자인 브라이언 드레이시는
“반복의 법칙은 정신적인 습관과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법칙”
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지역에 교회를 주시고 거기에 매일 혹은 매 주일 모이게 했을까?
왜 항상 기뻐하라고 했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을까요?
반복 효과입니다.
좋든 싫든 예배는 계속되어져야 하고 찬양과 기도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반복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영적인 일에 호감도를 높이고 영의 일에
친밀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형질이 변하게 하는 강력한 영적 법칙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강력한 영적 법칙인 반복의 효과를 통해 영적인 고귀한 일을 도모하여
그 형질이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 (사32:2)
                                                       
백동흠 칼럼 2010. 8. 31. 07:28

경술년 국치의 날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1905년 러일 전쟁중의 조선의 모습을 그린 시사만평입니다. 

 
경술년 국치의 날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백 동흠목사 

8월 29일 주일인 어제가 100년전 오늘 경술년 국치의 날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우연히 아무 생각없이 이곳 LA에 유학 온지 3년차된 High School
형제에게 물어 습니다. 
6.25가 무엇이니?
해방되는 것 아니에요?
그럼 8.15는 무엇이니?
그것은 북한하고 관계된 것 아니에요?
형제의 말은 초등학교, 중학교다니면서 전혀 배운 바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문에도
한국의 국사에 대해 깊이 안 것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안 것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고작이었습니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뿌리를 없게 만드는 것이요
자신이 정체감을 모르는 자는 미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의 망함과 구한말의 역사는 너무 부끄럽고 비참한 역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끄럽고 비참한 역사 현장일지라도
알고 있어야 하고 알게 해야 합니다. 다 한 가지 이유는 그런 역사의 과오를
범해선 안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당시의 시사 만평을 통해 우리 한국이 세계 열강속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약하고 무력했는지를 알게 하고 있습니다.
                                                                        
1905년 미국의 시사 잡지 하퍼스 위클리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줄다리기에 낀 챈 꼼짝 못하는 조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일본의 승리 후 일본은 조선은 닭으로 풍자한 만평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1905년 12월 15일
닭장속의 닭이 주인이 주는 모이를 받아먹는 만평이 실렸습니다.  
그 새장 옆에는 “조선산 보호 새(朝鮮産保護鳥)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1906년 6월 6일
식탁 위의 닭을 놓고 제복 차림의 두 사람이 칼을 쥔 채 서로 째려보는 만평이 실렸습니다.
만평의 제목은 “조선 요리 경쟁” 이라 적혀 있습니다.
조선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강경과 온건파의 정책에 대한 만평이었습니다.

경술년 국치일인 1910년 1월 1일
닭장속의 닭이 서로 흉한 모습으로 싸우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 아래의 제목은 “친일 닭과 배일 닭이 여름 파리 떼처럼 싸운다.- 누란(累卵)의 위기도 모른 채…….” 라고 적혀 있습니다.

1910년 6월 5일
카이저수염의 요리사(데라우치 조선총독)가 닭의 목 가지를 쥐고
금방 목을 내려 칠 기세로 언제 칠까? 말까? 고민하는 그림을 실었습니다.  
그 후 정확히 86일 지난 후 일본은 닭의 목을 치고 말았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이토 히로부미가 저승에서 정한론(征韓論)의 대표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한 마리의 닭을 바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닭의 이름은 조선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뉴욕 타임지
“조선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 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고 보도했습니다.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린다.”에서 발취한 내용입니다.

우린 우리의 역사를 너무 모르고 살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과오를 범치 않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고 알게 해야 합니다.
민족의 역사성를 갖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 미래 역사의 문을 열게 함으로
부끄러웠던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영광스런 민족의 역사를 세워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0. 8. 28. 12:30

재해는 미래의 운명입니다,

 


재해는 미래의 운명입니다. (7월 23일 푸른편지의 글입니다.)

                                                                                    백 동흠목사

환경 운동을 하는 라이너스가 6도의 악몽이란 글을 썼습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지구의 온도가 6도까지 상승할 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라이너스의 글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1도의 상승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녹색들과 산과 기름진 농토 밑에 잠자던 모래층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만년설이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하고 산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2도의 상승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로 인해 바닷물이
산성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경작 불가지역이 확대되고 물 부족사태와 홍수나 집중호우,
태풍, 가뭄이나 이상고온 및 그에 따른 산불 등 피해 규모가 점차 커집니다.

3도의 상승 때 나타나는 현상은 거대한 녹색지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며
아마존의 지역까지도 사막화현상이 나타납니다.

4도의 상승 때는 남극의 빙하가 완전 붕괴됩니다.

5도의 상승 때는 북극의 빙하도 완전 녹아들어 인류의 거주 지역이
점차 바다 속에 잠기기 시작하며 인류는 생존을 위한 땅 확보의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6도의 상승 때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멸종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라이너스는 현재 2도와 3도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진행 중이며
이제 곧 3도 상승과정으로 진행하게 되면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4도 5도 6도로 기온 상승이 이루어지며
인류는 어느 날 갑자기 멸망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린 이런 자연 재해 현상 앞에서 어떤 삶을 준비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재해는 미래의 운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아무리 녹식운동하자고 하고 친황경운동을 한다고 나라와 정부와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더라도 인류는 자신의 국가와 개인의 익권을 위해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이땅을 황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은 예언하기를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게 될 것(계8:7) 이라고 했습니다.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될 것(계8:8)
이라고 했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온 지구상의 도시들이 깨어질 것이라고도 했습니다.(계16:18-19)

둘째는 지금은 뛰어난 도덕성의 회복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런 자연적 재해와 저주는 그 땅의 사람들의 타락 때문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에덴은 엉겅퀴로 바뀌었습니다.
노아시대의 모든 사람이 육체가 되고 그 땅이 패역해 짐으로 홍수로 인해 인류가
멸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의 성의 성 도덕의 타락과 남색하고 여색하는 음란함이
그 도성이 유황과 지진으로 땅에 묻히었습니다.
그 땅의 사람들의 패역함이 그 땅이 그 사람들을 토해낸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8:25에 보면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낸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8장28절에도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땅이 너무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음란하고 패륜적이고 아벨의 피가 땅에 흥건해 지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깨어서 정직을 선포하고 진실을 외치며 뛰어난 도덕성을 보여
주어야 할 때입니다.

셋째는 나 하나 만이라도 의인의 자리를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강박합니다. 듣는 귀가 닫혀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란으로 몰아가고 패륜적 사건이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도 세속의 사람들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파당과 분열, 거짓과 탐욕, 음란과 불륜이 가득합니다.
서로에게 실망과 상처만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며 경건의 질과 도덕성의 질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여전히 성도됨의 자리를 지켜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섬겨주고 봉사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제단을 지켜는
사람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7년의 극한 가뭄 속에서 한 여인을 피신하게 하신 것도(왕하8:1)
엘리야를 그릴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보호하신 것도(왕하17:4)
소돔의 멸망에서도 롯의 구원도(창19:29)  재해 앞에서 하나님의 특혜가 있습니다.

누가 알까요?
내가 주 앞에서 신실함으로 우리 가정과 동네의 가뭄과 홍수의 재해를  
막아 줄는지 누가 알까요? 나의 뛰어난 도덕성의 흐름이 내 가정과 우리 동네의
지진을 피하게 해줄는지 누가 알까요?
노아는 당대의 뛰어난 도덕성의 사람으로 주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정을 홍수의 재해로부터 피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특혜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재해는 미래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할 길을 충분히 주고 계셨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0. 8. 28. 04:03

노스리지 지진이 터진 동네에 살았습니다.

       우리 동네의 Free Way가 지진으로 부셔진 현장입니다.

노스리지 지진이 터진 동네에 살았습니다.

                                                                  백 동흠목사

노스힐(North Hill)의 하우스로 이사 온지 3주일 채 안된
어느 날 노스리지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그날이 마르틴 루터킹 데이 연휴 기간 이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날 산타 바라라 쪽으로 기차여행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새벽 4시 30분 일 것입니다. 갑자기 흔들거림에 깨어났습니다.
아내는 순간적으로 “지진이다” 외치더니 가족 본능이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하나 있는 아들과 저를 껴안고 이불을 감싸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출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마치 수직으로 침대위에서
퉁퉁 몇 번을 튕겨 올랐습니다.
마치 농구공이 바닥에 치면 튕기는 현상 같았습니다.  
굉장히 큰소리의  “쾅”소리가 났고 열차가 지나가면 진동하며 울리는
그런 소리도 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조용해 진 것입니다.
침대에서 내려 방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올 때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부엌의 냉장고는 한참 밀려 나와 있고 찬장의 접시들이 줄줄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져 있었습니다.
어항은 업혀져서 부셔져 있고 고기들이 팔딱 거리며 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은 어두웠습니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불기둥이 솟아 북녘하늘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발보아 도로가 움푹 파일정도의 가스관이 터져 나간 것이었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렀습니다.
6.8도짜리 노스리지 지진은 어느 날 순간 갑자기 이렇게 다가 온 것입니다.

불과 보름 전에 제가 살던 아파트로 달려갔습니다.
우리 교회 몇 분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아파트의 외벽이 나가 버렸습니다. 밖에서 훤히 드려다 보였습니다.
방안의 벽과 단스도 내려 앉아 있었고 문은 터져 나가 버렸습니다.
다행이 사람이 들어 오지 않아 비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거기 살았다면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침대 밑에서 꼼짝 못하는 토마스네의 가정을 꺼내 주었습니다.
효정이네는 문을 부수고 나오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습니다.
그 아파트는 곧 폐쇄조치가 취해 졌습니다.
사람들은 여진으로 밖에 나와 천막생활을 했고 Free Way가 끊어져 교통이 마비됐고
가로수의 등이 다 떨어 져 나갔고 신호등이 다 휘어져 버렸습니다.
집이 무너져 내린 사람들은 몇 군데 설치된 쉘터로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그 조용한 동네가 너무 심란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노스리지 지진은 72명의 사상자와 8700명의 부상자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사한 동내는 언덕바지 밑에 있는 동네인지라 지반이 든든하기에 비교적
집들이 피해가 없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창문하나 깨진 것 없었고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우리 집은 갑자기 쉘터(shelter)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주무시고 식사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재해는 우리의 운명입니다.라는 글을 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었습니다.
 
왜 재해는 미래의 인류의 운명이 될까?  몇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인간은 미래로 갈수록 더욱 패역하여 지기 때문입니다.(딤후3:1)

둘째 이유는 자연이 인류를 토해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토해내는 지경까지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18:25, 창4:12) 그날을 감하여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육체가 없을 정도의 날이
올 것입니다.(마24:22)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마24:40,41)

우리가 이 땅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 하나만이라도 의임 됨으로 살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더 격조 높은 도덕성의 질을 살아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재해로부터 피하게도 하고
막아 주시도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의 자비와 긍휼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와 관계되어 있는 가정 자녀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눈물로 주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 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 아브라함과 조카와 그의 딸 관계를 통해
재해로 부터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종종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한답니다.
공갈은 하지 마라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박은 할 만하다. 목숨이 아깝거든 예수 잘 믿으라고요.
저는 지금 형제님을 자매님을 협박합니다.
목숨이 아깝거든 예수님 잘 믿자고요.
백동흠 칼럼 2010. 8. 28. 01:25

마음을 넓히는 훈련을 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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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훈련은 마음을 넓히는 훈련입니다.

                                                                       백 동흠목사    

요즈음의 세대는 속은 비어 있으면서 겉은 화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상품은 형편없는데 광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포장은 고급스러운데 내용물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화려한 삼풍백화점 어느 날 갑자기 주저앉은 것도
한강의 대로가 등굣길에 무너져 내린 것도
겉은 화려한데 내면은 부실한 연유였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바리새인들을 싫어했던 이유는,
그들의 내면은 냄새가 나는데 겉만 회칠한 무덤처럼 단장했기 때문입니다(마 23:27).
하나님은 우리가 깊이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존 울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 합니다.
"당신은 깊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사람들의 영을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깊이 있는 사람이 될 때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큰 바다처럼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보고 그 물에 뜰 수 있는 배가 어떤 배인지를 압니다.
시냇가에는 종이배를 띄웁니다.
호숫가에는 유람선을 띄웁니다.
대양에는 수백 명을 실어 나룰 수 있는 큰 배를 띄웁니다.
우리의 마음이 웅덩이 같아서 어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을까요.
영성 훈련하여 바다같이 마음의 그릇됨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도종환님의 시 하나가 또 다시 생각납니다.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깊음이 있는 삶” 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했습니다.(빌2:5)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3)

백동흠 칼럼 2010. 8. 14. 04:01

재해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빠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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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해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빠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백 동흠목사 

어제 중앙일보에 난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주 큰 얼음판이 둘로 갈라져서 떨어져 나가는 사진입니다.
북극의 2대 빙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그린란드 피터먼 빙하에서 초대형
얼음판이 떨어져 나간 사진입니다.

미국 델라웨어대 안드레아스 무엔초우(해양물리학) 교수는
“그린란드 최북단에 위치한 피터먼 빙하에서 5일 이 빙하의 4분의 1 크기에 해당하는 표면적 260㎢에 길이가 72Km, 높이가 200m에 달하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분리되어 떨어져 나왔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 면적이 서울시의 절반에 가까운 크기입니다. 

환경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인류의 문명과 산업 활동 기간은 불과 100년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구의 환경의 악화의 시작으로 온난화 현상으로 남극과 북극의 얼음판이 옅어지고 해수면이 서서히 상승하고 산성비로 산림이 손상되고 재해 현상으로 산불과 가뭄, 그리고 생태계의 위계질서의 파괴 현상은 불과 50여년의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현상이라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천연림이 1950년 이후 2%의 비율로 사라져 왔다고 하는데 앞으로 그 비율이 배가의 상승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더, 더 놀라운 일은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불과 10여년의 기간 동안 6,000여종에 가까운 양서류가 멸종위기를 맞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진의 횟수는 2000년대 들어 수직 상승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여려가지 자연현상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의 재해 현상은 인간의 도덕성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의 산업화, 도시화는 인간의 타락과 범죄와 연계되어 있고 인간의 타락화 현상은 환경의 저주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연의 재해 현상은 성서적 종말 현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이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재해는 미래의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이 되여질 것입니다.

셋째는 자연의 재해 현상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시작되어 어느 날 갑자기 굉장하고 빠른 속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의 현상을 보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 순간 직전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마24:39)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지금은 자다가 깨어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영적 지각을 사용하여 오늘과 미래의 흐름을 분별할 때입니다.
그리고 영의 흐름을 따라 성결하고 거룩함의 인격으로 변화되어진 삶으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