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1. 2. 16. 06:09

그대는 고객입니까? 예배자입니까?



그대는 고객입니까? 예배자입니까?

                                               백 동흠목사

2000년 이후 시청률 50%를 넘긴 드라마는
허준(63.7%), 태조 왕건(60.2%), 대장금(57.8%),
진실(56.5%), 야인시대(51.8%), 내 이름은 김삼순(51.1%)
주몽(50.6%)이었다고 합니다.

드라마의 3대 조건을  
주연의 탄탄한 연기력,
조연급 감초들의 뒷받침
설득력 있는 스토리의 전개를 두고 있습니다.
이 3가지의 조건만 갖추어 지면 30%대는 무사히 진입한다고 합니다.

40%대로 올라가고자 한다면
사회적 이슈가 결합될 때 시청률이 훌쩍 넘어간다고 합니다.

50%대로 올라가고자 한다면
입소문과 함께 10대 20대의 젊은이의 흡수작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마 50%대의 진입을 위해서는 드라마 자체보다
보이지 않는 광고 전략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시청률을 높이려고 할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수입입니다. 작가와 출연배우의 주가가 높아지게 되고
광고 수입이 많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교회에서도 적용되는 것이
오늘의 목회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주식회사로 보는 교수님도 있습니다.
사장을 목사님으로 봅니다.
주주를 장로님중심의 당회로 봅니다.
고객을 성도들로 봅니다.

고객(성도)이 많아지면 사장(목사)의 주가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주주(장로)들은 그를 하늘같이 모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일단 성도(고객)가 많아 져야 합니다.  
그래야 헌금이 많아지고 선한 사업도 하고 성전도 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가 교회에서 조차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드라마같이
고객 유치를 위한 방안으로의 목회 전략을 갖게 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런 흐름이 오늘 날 성도의 타락을 가져 왔습니다.
시청률 높이기 위한 예배로의 시도입니다.
이에 대해 성도들은 고객이 되어 지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교회에 대한 선택권을 성도들이 가져갔습니다.
채널을 바꾸듯이 얼마든지 교회를 왔다가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인기 드라마처럼 즐거움과 감동만을 요구하게 됩니다.
교회와 목사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강요할 뿐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선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셋째는 고객으로서 평가와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한 편의 예배가 연출될 때까지 안락한 시설과 편안함
그리고 분위기까지 평가하고 판단하는 고객이 되어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맘에 안 들면 어느 날 채널 바꾸듯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객은 보기 좋은 공연을 찾아다니지만
예배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써의 소속과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고객은 안락하고 분위기만을 요구하는데  
예배자는 외적 환경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상한 마음을 고백 합니다.

고객은 예배의 현장을 떠나면 여전히 위선된 삶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예배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정과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과 사명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대는 고객입니까?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백동흠 칼럼 2011. 2. 3. 05:08

권력 중독-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질병입니다

                                                                                   미주 장신대의 전경


권력 중독-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질병입니다.

                                                   백 동흠목사

Robert Greene은 그의 책“권력을 경영하는 48 법칙”
(The 48 Laws of Power)에서
“권력은 근본적으로 도덕과 관계가 없다.
권력을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 가운데 하나는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보는 능력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황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익권과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데이비드 L. 와이너(David L. Weiner)의 책 “권력 중독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개인이 권력 중독자로 변하는 시기를 3가지로 지적했습니다.
경쟁 상황에 돌입할 때
복수심에 사로잡힐 때
권한, 지위가 부여 받았을 때
권력 중독자로 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와이너는 위의 두 가지는
“개인적인 것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권한과 지위를 부여 받을 때는 그 파장이 크다고 했습니다.
포장된 공손함을 벗으면서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 망상적 신념,
독선, 위대성에 대한 환상, 남을 착취하고자하는 경향 등등으로 인해
조직과 질서가 깨뜨리고 무고한 자의 해치는 악을 낳게 된다고 했습니다.  

권력 중독자의 과정을 보게 되면

첫째 단계는 집착과 몰입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흡연중독, 알코올중독, 섹스중독, 마약중독, 도박중독. 게임중독 등등의  
중독현상은 몰입과 집중 현상입니다. 이것을 결정 작용이라고 합니다.
빨강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이게 되이듯이
집착과 몰입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집니다.(창3:6)
이때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게 됩니다.

둘째 단계는 내성과 금단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권력 중독의 내성과 금단현상은 상식의 선을 벗어나면서 시작이 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하게 됩니다.
흑백 논리의 사고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자신의 유리한 쪽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됩니다.
상식의 선에서 처리될 사항들이 임의롭게 처리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데이비드 L. 와이너는
“외면적으로는 순진하고 따뜻한 성품을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종종 도덕이나 윤리, 예의, 상식마저
무시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단계는 파멸의 단계로 가게 됩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 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죄는 사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야1:15)
다행히 주어진 권위와 지위가 사라지면
다시 순종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와이너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깊은 상처를 남긴 후가  됨으로
불행의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권력 중독자가 되면 본인도 불행해 지고
그의 주변의 사람도 불행해 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권력 중독증이 나타났습니다.
지위를 얻을 때, 권세를 얻을 때,(막10:37)
나를 주님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스스로 비워 섬기는 자가 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함으로
권력 중독 증세가 나타나선 안 된다는 말씀을 제자에게 주었습니다.  

얼마 전 미주 장신대에 경겅회 말씀인도 차 갔다 왔습니다.
100여명의 젊은 형제와 자매들이 모여 찬양하며 예배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총장님과 교수님들의 순수한 학자적 기품과 열정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교정도 이제 갖추어 졌고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이는
선지 학교가 미국의 땅에 멋있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다음 세대의 일꾼들이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LA 노회 노회장이다 보니
총회 임원과 신학교 이사회의 되어지는  소식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총회 임원을 대상으로 법정 청원서까지
정식 문건으로 보내 온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볼 때
권력 중독의 증세와 너무 똑같은 흐름을 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학교와 순수한 사명감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 선지 생도들 앞에서
법적 고소 사건, 해임 사건 같은 질 낮은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권력 중독증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증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마20:25-27)
세상의 권력은 군림하고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마음을 비워라 그리고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실 것이다.
백동흠 칼럼 2011. 2. 3. 04:54

그래서 푸른편지를 보내드리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푸른편지를 보내 드리지 못 드렸습니다.

                                                                백 동흠목사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계십니다.
퇴원하기 전 가정이 모여 상의 한 결과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반대 했었습니다.
소변도 투브로 받아 내시고 음식도 투브로 주입하시고
몸의 90% 이상이 마비된 상태로 누워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24시간을 옆에서 지키지 아니하면 안 되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효자인 형님은 못 할 때 못하더라도 모시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동의하게 됐습니다.  
형의 두 아들이 너무 성실했습니다.
두 아들을 도움을 받아 24시간 할머니를 지키며 돌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오전시간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6시 20분 어머니에게로 출근합니다.
주무시면 조용히 기다리다가 깨어나시면
손을 붙잡고 기도해 드립니다. 찬양을 해 드립니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정돈하여 드리고
기저귀와 변을 깨끗이 닦아 드립니다.

욕창- 어머니는 몸이 말라 꼬리 뼈 쪽이 볼록 튀어 나왔는데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중에 그 곳의 피부가 다 헤어지고
동그랗게 구멍 뚫리듯이 피부가 패였습니다.
이것이 욕창이었습니다. 저는 욕창을 처음 보았습니다.
움푹 패어서 피부의 내면 층이 보였습니다.
소독을 해 드리고 약을 바르고 가제로 붙여 드립니다.

음식은 배로 들어가는데 음식이 들어가는 부분을 닦아 드리고
소독하여 가제로 붙여 드려야 했습니다.
그 후 몸과 얼굴과 머리를 닦아 드립니다.
맨 처음에는 꼬박 3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2시간이면 넉넉히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시간에 맞추어 투약을 해드리고
시간마다 물도 넣어 드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놀랄 만큼 회복이 눈에 띄게 보였습니다.
얼굴이 평안하고 조용히 잠이 들고 깨어나시더니
긴 꿈을 꾼 것같이 얼굴이 밝아 보였습니다.
조금도 요동하지 않던 왼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귀가 들리는지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습니다.
요 며칠 전에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 들어 온 저를 보더니 뭐라고 중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틀리가 없는 입으로 오물락 거리며 하는 말은
“가서 좀 더 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면 오른손을 들고 흔들며 반가워합니다.
저는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해 드립니다.
어머니는 아멘을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전달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좋은가 봅니다.
누워 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는 손과 발을 보면서
이 험한 세상을 홀로 살기에도 벅찼을 텐데
우리 6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온 몸에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강인한 사랑이었습니다.

참 추운 시절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을 이겨낸 사랑이었습니다.
몸은 외소 하지만 사랑은 거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몸을 닦아 드리고 이렇게 뒷바라지 한다는 것이
제게는 왜 이리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아셨는지 치유하심을 주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눈에 띠게 회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주님이 치료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욕창은 95%이상 다 낳았습니다.
마지막 딱정이만 떨어지면 된답니다.

어머니에게 약속하자고 했습니다.
2월 첫째주일은 휠체어 타고 교회가자고요
그리고 3월 달에는 휠체어 없이 교회가자고요
어머니는 밝게 웃으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다가오는 것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푸른 편지를 성실하게 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1. 2. 3. 04:33

최소량의 법칙에 대해 아시는지요?

최소량의 법칙에 대해 아시는지요?

                                                         백 동흠목사

이 최소량의 법칙은 독일의 식물학자 리비히(Libiheok)가 제창한 법칙입니다.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법칙입니다.
식물의 성장에는 3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질소와 인산과 칼리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그 하나의 부족한 부분까지만 식물이 자라고
그 다음에 성장이 중단되는 현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른 두 가지의 성장 요소가 충족되어도  
그 이상의 성장이 중단된다는 법칙이 최소량의 법칙입니다.(Law minimum)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저수지의 둑이 낮으면 낮은 만큼 물이 차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양동이가 있습니다. 이 양동이의 중간에 못을 쳐서 구멍을 냈습니다.
그러면 이 양동이는 그 못 구멍을 낸 곳까지만 물이 차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의 물이 차면 물이 새기 때문에 그 이상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최소량의 법칙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생명이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의 뜻을 순수한 우리말로 재해석하면 “김이 샌다.”는 뜻입니다.
김이 새면 밥이 설익게 됩니다.
생명이 술술 새어 버리게 하는 최소치의 한계점,
바로 거기서부터 밥을 설익게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곳-
이것이 최소량의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은 백점 만점의 훌륭한 인품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혈기가 욱- 하고 올라오면
그 훌륭한 인품이 거품같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의 훌륭한 자질들이-성실하고 충성되고 후덕하고 좋은 재능 등등-
혈기, 하나 때문에 생명이 술술 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말로써 생명이 술술 새게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기와 질투로써 생명이 술술 새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생명이 술술 새게 하는 최소치의 한계점이 되게 하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이라고 생각이 드시는 지요?
최소치를 높이여야 합니다.

혈기? 이제 그만 부리여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도 이제 버려야 합니다.
항상 지저분한 생활환경과 게으름도 바뀌어야 합니다.  
더 이상의 음란한 언행도 그만해야 합니다.
수근거림과 막말의 언어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썩어져 가는 구습이라고 했습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어 버리라고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최소량의 법칙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어도
항상 거기에서부터 생명이 술술 새어 나가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장도 축복도 행복도 담을 수 없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이제는 새해입니다.
우리가 좀더 온전하여지고 좀더 성숙되여 져서
최소치의 한계를 높여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생수와 축복의 강물을
넉넉히 담아내는 둑 높은 저수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1. 1. 8. 07:24

조금만 낮아지세요. 행복이 물같이 고여 옵니다.



조금만 낮아지세요. 행복이 물같이 고여 옵니다.

                                                   백 동흠 목사

어느 마을에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집은 참 삭막했고 썰렁했으며 가정의 식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겉돌았습니다.
사랑이 식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데 부모끼리 또한 자녀들끼리 자주
다투고 싸우고 했습니다.
또 한집은 가정의 분위기가 따뜻했으며 가족 상호간에 서로 위로와 격려가
넘쳐 습니다.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피부 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결코 가정 안에 큰소리 지르는 것도 없고 다투거나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 우리의 가정은 전자의 가정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후자의 가정의 모습인가요?

하루는 늘 다투며 싸우는 가정의 사람이 그렇지 않은 가정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네 가정은 그리 부요하지도 않은데 어찌 그렇게 화목하고 행복하게
사는가? 좀 나에게 평화의 비결을 가르쳐 주게나?" 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평화로운 가정에 사는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합니다. 우리 집은 나쁜 사람만 모여 살기 때문이지요"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의아해 하며 이해를 못하는 것이 였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사람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어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물 컵이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발로 걷어차서 엎질렀지요.
내가 부주의해서 "물을 엎질렀노"라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의 하는 말이 "물 컵을 거기 둔 자기가 나빴노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옆에 계신 우리 어머님께 "아니다 애들아 내가 보고 치웠어야 하는데 치우지
못 한 내가 나빴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막내 놈이 "아빠 사실 은 물을 달래서 마시고 아무렇게나 둔 제가 나빴어요." 라고 말하더군요.
이 조그마한 일에도 서로가 잘못했다고 내가 나빴노라고 서로가 먼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싸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라고 생각이 드시는지요?
똑똑한 사람,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로만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조금 져 줄줄 알고 조금 빈틈도 보여 주고 그저 내 탓으로 돌리고
난 부족한데 당신 덕에 내가 산다고 상대방을 높여 주는 사람이 있는 가정은
행복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차라리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고전1:27,28)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 마음을 비웠으면 합니다.
행복은 물같이 낮은 자리로 고이게 되여 있습니다.
우리의 어설픈 똑똑함이 얼마나 가정과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가는지 모릅니다.
조금 손해 볼 것 같아도
나를 비어 놓으면 주님은 참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답니다.
한번 해 보세요. 곧 체험케 될 것입니다.  샬롬 ♬



새해 들어 벌써 부부싸움 한 분이 있다고 하네요.
행복이란?
조금 덜 똑똑하고 조금 더 어설퍼서
그저 내 탓으로 돌리고
"내가 나빴어.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조금만 먼저 져주면된다고 합니다.
행복이란?
낮은 곳으로 고이는 물과 같답니다.
내가 조금만 먼저
낮아져서 내 탓으로 돌리면
금방 행복이 물같이 고여 온답니다.
진짜예요, 한번 해 보세요.^^


백동흠 칼럼 2011. 1. 8. 06:56

로버트 박 형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로버트 박 형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백 동흠목사

사랑합니다. 나의 형제여!

그래요
압니다.

그대의 얼굴
그 표정
슬픈 눈동자가
내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거짓에 눌리고

아파하는
영혼의 외침이
어둠에 묻히고

무기력한
내 모습에
괴로워 할 때

그게 우리인 것을
왜 모를 까요

그래요
압니다

그대의 얼굴
그 표정
그 슬픈 눈동자

내게는 그 모습이
더 다정스럽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형제여!


제가 위의 시를 쓴 것은 지난 해 2010년 2월 초순 이었습니다.
로보트 박 형제가 2009년 12월 25일 북한으로 들어가 43일 만에 돌아왔을 때의
그 얼굴의 표정을 보고 적은 시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순수한 사랑이 거짓이 눌리고
그 영혼의 몸부림이 어둠에 짓밟히고
맥없이 무기력하게 조롱당하며 처참하게 무너져서
살아 돌아온 모습이
그 얼굴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얼굴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을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죽으러 가서 살아 왔습니다.
인격적으로 엄청난 모멸과 수욕을 받음으로
인격과 자존감 망가졌음을 고백했습니다.
스스로 더 이상 살 가치도 없고 기력도 없이 황폐하게 넝마같이 버려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병원 생활하며 정신 치료를 받으며 주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주저 않으면 악의 세력에 패배하는 것이기에
눈물로 주의 자비를 호소하며 견디어야 했고 이기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치유하심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회복되어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 동토의 나라에서 고통 받은 북한의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실패한 순교자의 마음으로
겸허하게 북한의 인권을 위해 나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형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북한 인권을 위한 선언문

로버트 박이
새해 들어 1월 3일 열방 샘 교회에서 북한 선교 예배 때 선포한 선언문입니다.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라 아래의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미국, 일본, 영국 등 세계 각국의 국민들께 우리는 김정일과 김정일 집단으로 부터 고문, 노예, 노동, 기아, 공개처형 등 여러 잔인한 방식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구하고자 급히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청합니다.

현재 국제법과 국제기준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정당한 정부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김정일과 김정일 체제는 명백히 국제 범죄자들로 한 세대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며, 수백만의 가족들을 분단의 설움을 안기고, 수백만 명을 살해하고 노예로 만든 것에 대해 인류와 정의와 진리의 이름으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제노사이드 협약 2조에 의하면 기독교인들과 가족 3세대를 학살하는 것은 집단 학살로 여겨짐으로 국제사회는 북한에 개입할 의무 뿐 만 아니라 법적인 권리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김정일 체제로 부터 살해되고 강간당하고 노예로 만들어지며 고통 받고 있는 수백만을 대신해 제노사이드 협약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양심 있는 자들과 글로벌 지도자들께서는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고 억압받는 수백만의 북녘 동포들을 위해 즉각 행동에 나서 주실 것을 요청 드리며, 한 체제가 조직적으로 죄 없는 수백만 명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인류의 원칙에 어긋나는 명백한 범죄 행위이기에 이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범죄 집단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수백만 명의 북녘 동포들과 아이들에게 자유와 하나님의 정의를 선언합니다. 우리는 김정일 제노사이드와 대학살에 의해 기아로 죽어가는 수백만의 북녘 동포들에게 자유와 하나님의 정의를 선언합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자유로 살 수 있는 것만을 희망하고 바라는 모든 북녘 동포들에게 자유와 하나님의 정의를 선언합니다.

(참조: 2011년 제노사이드협약 62주년을 맞이하여 라파엘 렘킨의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유대인 대학살 이후 가장 중요한 글로벌 운동 중 하나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0. 11. 28. 08:16

전쟁의 역사와 연평도 폭격 사건





전쟁의 역사와 연평도 폭격 사건

                                                  백 동흠목사

지난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시작한 이래로
1912년 발칸 전쟁,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
1950년 한국 전쟁
1960년 월남 전쟁, 중동 전쟁,
1970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과 이라크간의 8년 전쟁,
1980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간의 포클랜드 전쟁,
1990년 걸프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보게 되면
1차 세계 대전으로 사망자 8백만 명이 사망했고
2차 대전으로 전사자 5천만 명,
한국 전쟁에서 25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기타의 전쟁과 테러와 혁명과 재해로의 죽음을 포함하면
자연사 아닌 죽음이 20세기 100년의 기간에 9억의 사람이 살상됐다고 합니다.

인간의 역사 3421년의 기간 동안에 전쟁이 없는 기간은 286년에 불과했습니다.
인간 역사의 90%가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죽음도 자연사가  형 카인에 의한 아우 아벨의 살인 사건이었음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쟁의 행위는 하나님을 떠난 카인의 문명권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전쟁 행위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저지른 가장 무서운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폭력적인 전쟁 행위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개입이 스며 있음을
성경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요1서 3:12)

지난 11월 23일 북한은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었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대한 민국의 땅
연평도에 폭격을 가함으로 또 한번의 범죄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한반도에 또 한 차례의 전쟁의 두려움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확전 운운하면서 설왕 설래합니다.
미국의 오마바 대통령도 우리 대통령도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불과 최전방에서 30여마일 앞에 일천만 서울 시민과
대한 민국의 국민의 안보와 행복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정일과 그 집단은 이런 약점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미끼로 삼아 이런 만행을 꺼리낌없이 저질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평화와 행복이 그 두려움에 담보로 잡히게 해선 안 될 것입니다.
전쟁은 죄악이고 무서운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사단의 사주와 충동질이 있습니다.

역사는 피해가려고 하는 자들에게 미래의 역사가 주어 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18)
때론 당당하게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응전할 때
전쟁의 두려움도,
마귀의 세력도 우리를 피해 갈 것입니다.(야4:7)

지금은 우리 교회와 성도님이 영적, 정신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국민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고
무장하도록 모본이 되면 앞서가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삼상17:47)
백동흠 칼럼 2010. 11. 17. 08:53

인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백 동흠목사  

뉴 밀레이엄의 리포트-
“첫 10년 인간,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다.”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의 신경 과학연구실의 스티븐 퀴츠 교수는 말하기를
“ 당신의 뇌를 보여 달라 당신의 마음을 읽어 주겠다.” 고 했습니다.
기능성 자기 공명 장치(fMRI) 로 뇌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에서는 5월 화학물질로 유전자를 제작
이 유전자를 주입해서 “인공 생명체”를 만들었습니다.
벤터 소장은 곧 인공생명체인 박테리아를 대량 생산하여 공해를 없애고
수질을 정화하는데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010년 올 초 네덜란드에서는 “시험관 고기 컨소시엄”에서
실험실 돼지고기를 공개 했습니다.
줄기 세포 복제를 통해 작은 주사기만 한 돼지고기를 만든 것입니다.
이 연구를 이끈 마크 포스트 박사는 “같은 방식으로 소, 닭, 양고기도 만들 수 있다.”고 함으로 인공 육류 시대의 문이 열렸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개발한 큰 혁명 중에 하나가 나노 기술이라고 합니다.
나도 기술이란 나노m(10억분의 1m) 수준으로 물질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뜻합니다. 나도 기술은 물질을 이루는 가장 단위인 원자(原子) 까지 만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모래알 보다 작은 나노 건전지가 개발됐고
몸 안에 주사하면 암 세포를 찾아내는 나노 암 진단기도 나왔습니다.
민킨연구소의 배리 민킨 박사는
“나노 시술의 발달은 곧 인간이 필요한 물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009년 3월에 발사한 우주 망원경 “케플러”는 “생명체가 있는 별 찾기”가
목적입니다. 1년이 지금 700개의 행성을 찾아냈고 그 중 140개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음을 발표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 “그리제 581g”은 생명체가 살고 있음을
100%의 확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달 스티븐 호킹박사는
자신의 책 ‘위대한 설계(Grand Design)’에서
우주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대폭발인 ‘빅뱅’이 신적 존재의 개입이 아닌
중력의 법칙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하나님의 영역으로 침범해
드려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대함을 바벨탑같이 높이 쌓아가며 승리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성 도덕의 타락과 가정의 붕괴, 테러와 전쟁,
폭력과 인권의 유린, 빈곤과 질병의 문제와 늙음과 죽음의 문제가
내면으로부터 스며 나오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이제는 더욱 깨여 있을 때가 되었습니다.
밖의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믿음 챙기고 잃어버린 영혼위해 전도하시다가  
때 되여 주님이 우릴 데려가시려고 부를 때 미련 없이 떠날 준비 했으면 합니다.
아멘

백동흠 칼럼 2010. 11. 14. 10:26

어머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신 분입니다.

어머니- 무명한 자 같은나 유명하신 분입니다.

                                                        백 동흠목사

지난 5월 다리 수술 후 휠체어를 타시고 주일 늘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저의 작은 형님이 항상 모시고 교회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10월 31일) 예배를 인도하면서 보니 예배의 자리에
안 보입니다. 예배를 마친 후 물어 보니 어머니가 넘어 지셨다고 합니다.
난 그저 살짝 넘어지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어머니에게 찾아가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워만 계셨습니다. 머리를 다치신 것입니다.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말도 잘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힘겹게 하는 한말이
“아퍼”입니다.  
그리고 또 한마디
“밥 먹어야지” 이었습니다.
왜 이 두 마디가 제게 마음이 절여오는 아픔이 되는지 모를 일입니다.

어머니가 좋아 하는 찬송을 여러 곡을 불렀습니다.  
입술을 보니 함께 부르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시켰습니다.
오랫동안이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과 자녀들을 위해 일일이
축복해 주시는 기도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월요일(11월1일)  병원에 들어 가셨고
MRA을 찍은 결과 머리 부위에 피가 응고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문의가 자세히 검진한 결과 머리의 핏줄이 터지지 않아
  수술 없이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그 다음 날 전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 어머니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주님 앞에 의탁하는 순간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느니라.”
고린도 후서 6장 9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제 마음속에 울려 펴질 때 어머니의 일생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평생을 서서 남들을 시중들며 섬기며 살아 온 생애였습니다.
어릴 때 한 상 차려 주시고 부억 부두막에서 바가지 밥을 드시는 것을
늘 보면서 자랐습니다.
밥이 부족할 까봐 수북이 담은 밥을 옆에 살짝 갖다 놓아 줍니다.
더 먹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시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밥 달라는 거지들에게
듬뿍 퍼 주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누군가 힘겨워 할 때 몇 푼의 돈을 그 손에 쥐어 주는 모습입니다.
주의 종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이 교회에 방문 후 돌아가실 때 푼돈같이 모은
뭉칫돈을 아깝지 않게 그 손에 쥐어 주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친척들이 몰려와서 며칠씩 묵어도 혹은 몇 달씩 머물러도 조용히
섬겨 주던 모습입니다.
 
큰일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지역의 유지도 아니고 유명인사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마다 나라와 민족과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조용히 교회의 뒷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필요하면 늘 다가와서 섬기신
어머니이십니다. 
얼마나 일을 하셨는지 손가락의 지문이 달아 버린 어머니의 손입니다.

저는 내 어머니의 모습속에서 우리 시대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 중얼 거렸습니다.
“그래 맞아!
땅에서 무명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 유명하신 분들일거야!"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땅을 기도로 지켜 주시고
믿음과 사랑으로 키워낸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 이분들이 진짜 유명하신
분들이거야"
이것은 나의 임위로운 생각이 아니라 성령이 내 영과 더불어 스며 나오게 하는
영의 생각이었습니다.

웬만해서 절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저의 귀에다 대고
“아퍼”
“밥 먹어야지…….”
그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식당을 가리키며
“어여가! 가서 밥 먹어!”

아무 때고 어느 시간이고 찾아 가면 환한 얼굴로
담복장(청국장)을 부글 부글 끓여 따근한 밥에 차려 주시던 어머니는
몸은 침상에 누워 있지만 마음은 백번 천번 밥상을 차렸을 것입니다.

지금 제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막 흐릅니다.
마음이 절여 옵니다.

"예수님!
 함께 해 주세요.
 불쌍이 여겨 주세요.
 주님 밖에 없기에 주님께 의탁드립니다."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2010.11.3.)

백동흠 칼럼 2010. 10. 29. 07:46

우린 생각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우린 생각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백 동흠목사  

13세의 한 어린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공부하라고 혼냈습니다.
말 안 듣는다고 때론 매도 댔습니다. 처음에는 서운했습니다.
아빠는 왜 나만 때리지? 아빠 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정말 아빠는 미운 사람이다. 보기도 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빠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빠를 죽이자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키웠습니다.  
그러더니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행동으로 옮긴 것이 방화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빠 엄마 여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 어린 것이 오래전부터 생각을 키웠습니다. 파멸을 키웠습니다.

어느 부부가 자신들의 부부 싸움을 싸우면서
싸움의 동기와 싸울 때의 언어와 행동을 기록하고 분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는 부부 싸움의 동기가 너무 단순한 것이었다는 것
둘째는 부부 싸움이 진전되면서 조금씩 과격해 지고 있다는 것
셋째는 싸우면서 언어가 이혼을 향하여 조금씩 구체화된 언어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는 것
넷째는 이 상태로 계속 진행하게 된다면 미래의 언젠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혼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고 합니다.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생각을 키워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죽고 싶다는 자살의식도 오래전부터 조금씩 생각을 키워온 것입니다.
이혼도 오래전부터 조금씩 생각을 키워 온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제 아는 분은 이런 생각을 키워 나갔습니다.
다 필요 없어 마누라도 필요 없고 자식도 필요 없어
난 그저 조용히 빈들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

가정에서 아내와 충돌이 생기고 자녀들로 마음이 속이 상할 때 마다
이 생각을 스스로 키워갔습니다.

지금이 기회라고 외진 곳에 집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갔더니 심장질환에다 심한 당뇨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시력도 문제가 있어 운전도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 뒤 빈들의 조용한 그 집에 가서 살게 됩니다.
이때 즈음 자녀들은 다 떠났고 아내는 직장으로 인해 주말 부부로 살게 됩니다.
그의 노후(아직 젊은데..)는 외롭고 적적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홀로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오늘의 삶을 그 분은 생각으로 키워 온 결과임을
알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정말 그대는 지금 무슨 생각을 마음에 품고
 그 생각을 키워 가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롬8:6)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