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0. 7. 4. 08:29

솜털 원숭이와 철사 원숭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솜털 원숭이와 철사 원숭이
 
                                         백  동흠목사

한 행동학자의 실험이 있었습니다.
원숭이 우리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어미 원숭이를 양쪽에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한쪽은 철사로 칭칭 감아서 어미 원숭이를 만들고 그 젖꼭지에 우유가 나오도록 했습니다.
또 한 쪽에는 솜으로 칭칭 뭉쳐서 어미 원숭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솜털 원숭이에게는 우유병을 달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 안에 새끼 원숭이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원숭이 새끼들이 배가 고프니깐 철사 원숭이에게 다가가 젖을 빨아 먹고 내려와 놀곤 했습니다.
이때 이 새끼 원숭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괭가리를 울리고 괴성이 들리게 했습니다.
그때 이 새끼 원숭이들이 자신에게 젖을 준 철사 원숭이에게 달려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새끼 원숭이들은 솜털 원숭이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습니다.  
그 뒤 새끼 원숭이들이 솜털 원숭이 주변을 돌며 놀다가 배가 고프면 철사 원숭이에게 가서
살짝 우유만 먹고 다시 돌아와 솜털 원숭이의 주변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실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왜 현대인이 외롭고 고독한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철사 원숭이같이 똑똑하고 유능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적입니다. 말 한 마디에 똑똑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완벽합니다. 다만 이뿐이라면 철사 원숭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둘째는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했습니다.
솜털 원숭이는 젖을 주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필요를 채워주지를 못 했습니다.
그러나 정서적입니다. 편안하고 따스함이 있습니다. 쉼이 있고 안식이 있고
위로와 평강이 솜털 원숭이의 품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 새끼 원숭이들은 본능적으로 솜털 원숭이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그대는 철사 원숭이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솜털 원숭이의 모습인가요?
너무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 조금 어수룩하게 보이고
좀 부족해 보여도 넉넉히 품어주고 변함없이 품어 주고 항상 품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거기에 늘 있었으면 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0. 7. 4. 07:50

휄체어의 황제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휠체어의 황제 이야기
 
                                                           백 동흠목사

얼마 전에 시중에 베스트셀러였던 "오체불만족"이란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그 책은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형편에서 행복을 만들어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책의 지은이는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4학년인 오토다게 히르타다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손과 발이 모두 10센티밖에 되지 않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자기의 삶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요새 개성시대인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개성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는 어깨와 머리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글을 씁니다.
그리고 입과 어깨로 가위질을 합니다.
또한 양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볼 하면서 농구를 하기도 하고,
겨드랑이 사이로 철봉을 끼고 턱걸이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모습을 자기만이 가진 장기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의 어렸을 때 별명은 <휠체어의 황제>였습니다.
항상 자신 있게 살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골목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어둔 기색이라곤 없습니다. 어머니도 그렇게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후 한 달만에 처음 보게 되었는데 처음 자식을 보고 한 소리가
"아! 정말 귀엽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도 전혀 자식에 대한 부끄러움 없이 자식을 남들 앞에 소개했고
자주 산책을 해 주었습니다.

초등학교 은사인 다카기 선생은 4년간 그의 담임을 자원하여 멘토가 되어서
무조건 도와주지 않고 오토다케가 모든 일을 스스로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정상인도 들어가기 힘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행복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할 뿐입니다.

괴테는 말합니다.
행복에 관하여 논하지 말라
지금 행복한가를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어떻세요? 지금 행복한가요?

백동흠 칼럼 2010. 3. 21. 13:11

지진, 그 흐름을 읽고 계신지요?




지진, 그 흐름을 읽고 계신지요?

                                     백 동흠목사

순간의 흔들림이 자연과 문명과 사람과 그 모든 것이 무너지게 한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 장이 종이 같이 지축이 흔들릴 때 인간과 그의 문명은 어린아이가 갖고
논 장난감같이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전 그 현장에서 인간의 무기력을 배우고 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 분 앞에서 겸손해야 할
인간과 문명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진은 하나님이 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나타난
자연의 현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덴의 엉겅퀴의 재앙도 아담의 타락에 의해서였고
노아시대의 재해도 그 땅의 사람의 강포함과 패역함에 인해서 였습니다.  
소돔성과 고모라의 재난도 결국 그 땅의 사람들의 남색하는 동성애자들과
성도덕의 문란함과 음탕함이었습니다.

제가 한참 이이티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즈음에
칠레에서 8.8도의 지진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 곳 아이티의 지진의 1000배 라 할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요.
순간 제 마음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처처에 큰 지진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써의
큰 징조가 있으리라(눅21:11)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35)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겸비할 때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아멘.

위의 글은 푸른 들님이라고 하는 어느 자매님의 글입니다.

저는 최근의 지진난 것을 정리 해 보았습니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에서 7.0의 지진이 났습니다.
1월18일 북한·중국과 접한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 규모 6.7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2월 27일 칠레에서 8.8도 강진이 났습니다.
바로 그날 일본 오키나와 인근의 태평양 연안에서도 7.0도의 지진이 났습니다.
3월2일 필리핀에서 6.1도 오키나와 인근의 바다에서 5.1도의 지진이 터졌습니다.
3월7일 대만에서 6.3도의 지진이 났습니다.
3월8일 터어키에서 6.0의 지진이 났습니다.
3월16일 LA에서 4.4도의 지진이 났습니다.
특히 .LA 지진의 특색은 새벽 4시 4분에 4.4도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고들 합니다.

요즈음 새벽 마다 요한 계시록을 강해 하는데 계시록에도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아마 앞으로

첫째 자연의 재해는 계속 일어 날 것이고 더 자주 반복될 것이고
더 강한 재해의 현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는 이 땅에는 의인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이 있어야 이 땅을 고칠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울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때 입니다. 지금의 세대는
저들의 죄인됨을 문제 삼아서는 안됩니다. 나의 의인됨을 문제 삼아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특혜는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특혜를 받아 심판때 보호를 받았습니다.
롯도 소돔성의 재앙때 천사들의 통보를 통해 그 곳을 피하여 나왔습니다.
7년의 극한 가믐때 엘리사는 한 여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 가믐 지역을 피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가정에 적어도 한 사람의 의인이 필요하고
우리 동네 우리 지역에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
꼭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여 주지 않을 런지 묻고 싶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0. 3. 2. 04:23

아! 고난 속에 출렁이는 사랑이여!



                  
“아 고난 속에 출렁이는 사랑이여!”

                                                                          백  동흠목사 

아마 그때가 사순 절기였고 고난주간의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기 생생한 꿈 한 개를 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읍지 예루살렘 성문 밖 해골의 언덕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기진 할 상태로
초췌하게 무거운 형틀의 나무를 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분의 옷자락은
피로 얼룩져 굳어서 추해 보였고
얼굴과 온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땀으로 범벅이기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저 언덕 넘어 해골의 곳으로 가면
나무에 매어 달려 사지백체의 몰골을
드러내어 놓고 서서히 죽어 갈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다가가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까? 이 처절한, 비참한 모습,
그리고 마침내 서서히 죽어갈 그 고통을...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까?”

주님은 힘겹게 말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안다. 다 알고 있었지...”
“아니 알다니요? 알면서 어떻게 이렇게...” 깜짝 놀라 반문했습니다.
“애야 사랑이 나를...  나를 이 길로 가게 하는 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서서히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숨이 막히면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사랑이 이 길을 가게 했다..
사랑이 이 길을 가게 했다....”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흥건히 흘리며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난이요 아픔이요 수치요 부끄러움이라 해도 그리고
설령 죽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사랑은 얼마든지 선택하게 하고 그 길을 가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음을 그 날 이후 깨달았습니다.

아! 고난 속에 출렁이는 그 사랑이여!

백동흠 칼럼 2010. 2. 3. 04:55

로버트 박- 순종 그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버트 박 형제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백 동흠 목사

평소 북한 선교를 위해 외치던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친히 순교의 제물 되기 원해 사지(死地)로 들어간 형제를 위해 지금은 외칠 때인데
함께 일어나 부르짖을 때 인데 너무 한국 교회가 조용한 것 같습니다.

성도의 땀과 눈물이 배여 있는 귀한 헌금을 갖고 물량적으로 퍼주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원리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박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아주 많이 생각이 났습니다.
홀로 그 추운 날 북한 주민을 생각해서 남루한 옷을 갈아입고 그렇게 홀로 떠나갔습니다.

추위와 고통과 배고픔과 외로움
그리고 저 무지막직한 북한의 정권과 병사들에게 당할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왜 몰랐을까요?
어쩌면 죽을, 그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왜 모를 까요.
그럼에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려 오신 그 모습을 본받아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갔습니다.
죽음을 뛰어 넘는 위대한 순종을 이 젊고 어린 형제는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1천만 성도가 있다고 하지만 다 자신의 축복을 위한 순종을 하고 있을 때
그 형제는 북한의 고난당하는 형제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를 죽기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저는 그 형제를 위해 새벽마다 울면서 기도만 해드리는
저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일어나 부르짖고 싶은데  그래서 함께 일어나 부르짖을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했습니다. 전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너무 조용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막 저려오는 아픔이 쓴 뿌리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홀로 간 형제를 보며 마음이 아팠고
그렇게 홀로 그 십자가의 길로 가신 주님을 보며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리신 순교자의 피위에서 그 혜택과 축복을 누리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지 못하는 나와 너,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동흠 칼럼 2010. 1. 26. 16:07

맛 없어도 맛 있어요

 “맛 없어도 맛 있어요.”                                   

                                  백  동흠목사

줄기차게 비가 내리는 늦은 시간이다.
아내는 부엌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든다. 켈리포니아 겨울 비는
한국에서의 가을비 찬 향기 같은 것이 내게는 상큼하게 다가온다.

밖은 차서 그런지 방안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욱 아름다운 것 같이 모처럼 소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누리는 기분이다. 

밤 9시 즈음이다.
'여보 이것 만들었는데 집사님과 전도사님에게 갖다 줄까요?' 한다.
잡채였다. 시간상으로 좀 늦은 시간이지만 난 좋았다.
더불어 나누며 사는 삶이 얼마나 좋은지 좀 깊은 밤이 되였지만
찬비 속에 밤바람도 씨일 겸해서 쾌히 좋다고 했다.

전화 한 후 먼저 집사님댁을 찾아갔다. 그 다음 전도사님에게 갔다.
우중이라 차안에서 건네주면서 아내는 한마디한다.
"이것 맛있나 모르겠어요? 그냥 생각나서 갖고 왔지요?"
전도사님은 말한다.
"맛없어도 맛있어요"하면 반가워한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생각했다.
"맛없어도 맛있어요...!!"
전도사님의 한 마디의 표현이 뇌리를 스친다.
마치 주님의 음성이 되어 들려 오는 말씀이 있었다.
“그래 더불어 나누면서 산다면 맛이 없어도 맛이 있는 삶이 된단다. 더불어 위해주며 산다면 물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해주지....”

차창밖에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마치 주의 은총이 비 되여 흐르듯 산다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도님들이 사랑스러웠다. 
옆에 탄  아내가 사랑스러웠다.

백동흠 칼럼 2010. 1. 20. 05:43

웃음은 행복의 문을 열어 줍니다.

 

 
소문이 만복래합니다.


                                     백 동흠목사

우스운 이야기인데 들어 보기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고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며칠 지난 후 아담이 하나님에게 와서 말하기를
“하와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답고, 거기에다가 몸매도 완벽하고 살결도 희고 부드러우며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네가 그래야 하와를 사랑해 줄 것이 아니냐?”
아담은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몇칠이 또 지났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투덜 되었습니다.
“하나님! 하와의 외모는 정말 완벽합니다. 그런데 너무 멍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한마디 합니다.
“그래야 하와가 너를 사랑해 줄 것이 아니냐?”
(하하, 호호-- 이해 못하는 분은 할 수 없고요 후후)

어떠하신 지요 웃어지는지요? 아니면 하나도 안 우스운 지요?
웃음에 대한 반응을 조사했는데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에 비하여
웃음에 대한 반응도 느리고 웃음의 빈도도 낮았다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웃음을 잃은 사람들에게 질환이 쉽게 찾아온다는 증거를 반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학 졸업생의 사진으로 학생들의 웃음 표현을 측정했습니다.
그 후 30년 후의 그들의 가정생활, 대인관계, 직장생활을 추적하여 연구 분석할 결과를 내여 놓았습니다.
웃음이 풍부한 학생들은 굳은 얼굴의 학생들 보다 정신 집중력이 강하고 가정생활이 원만하고
개인 만족도가 높고 직장에서의 성공률도 뚜렷이 높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이 10년, 20년 지난후의 삶의 질이 큰 차이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괜히 심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항상 잔잔한 미소 속에 평안함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사를 짜증내며 항상 피곤하고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밝은 얼굴, 환안 웃음으로 대하면서 여유로움과 희망을 풍겨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속했는가?
우리 가정은 어떤 분위기로 물아 가는가? 스스로 물어 보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랍니다.
웃음은 만가지의 복을 들어 오게 하는 문입니다.

오늘 같이 분위가 어두운 날에는
밝은 얼굴로 웃음을 주는 이 옆에 있는 사람 행복하답니다.
밝은 웃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이 되었으면 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0. 1. 16. 05:46

은혜는 갚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갚는것이 아닙니다.

                               백 동흠목사

우리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베플어 주고 받은 상처로 인해 점점 마음의 문을 닫고 냉정의 윤리가 되여지는 세대입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살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곳에서 사업을 했었습니다.
열악한 여건에서 벌인 사업은 실패하고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심한 어려움에 처한 카네기는 그곳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 미국 이민의 길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여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의 친구이신 핸더슨 부인이 선뜻 이십 파운드의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기약도 없이 멀리 낮선 이민의 땅으로 떠나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보장도 없이 큰돈을 빌려 받은 카네기와 그의 가족은 몹시 놀라워하며 고마워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깍듯이 절하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돈은 꼭 갚겠습니다.”
핸더슨 부인은 괜찮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가서 꼭 성공하라고 했지만 받는 입장에서의 카네기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거듭 거듭 스스로 약속을 하고 기약 없는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떠나간 카네기 가족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하루에 50센트씩 핸더슨 부인의 돈을 갚기 위해 저축을 하였습니다.
몇 년을 걸쳐 모아서 드디어 그 빚을 갚게 되였습니다.

그 돈을 갚게 된 그 날 저녁 온 가족이 함께 축하 파티를 하였습니다. 그때 카네기가 온 가족 식구에게 말했습니다.
“빚은 갚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는 평생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 핸더슨 부인은 우리에게 여전히 고마운 분이고 은혜로운 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알았지”

그 뒤 여려 방면으로 카네기는 핸더슨 부인을 도왔다고 합니다.
아마 카네기의 이런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고 그의 앞길에 축복해 주시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자매님!

맞는 말 같습니다.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려울 때 베푼 그 은혜는 갚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잊지 말고 늘 감사하는 것이겠지요.

요 얼마 전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 전도사 시절의 어린 학생이 지금은 당당한 어른이 되어 푸른 편지를 전해 받고 펀지를 보내 온 것입니다.
“목사님 그 때 받은 사랑 몇 푼의 돈으로 갚아 지겠습니까? 그것은 갚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받았기에 그런 은혜를 주는 사람으로 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빚이라 했는가봅니다.(롬13:8)
산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백동흠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맛 없어도 맛 있어요  (0) 2010.01.26
웃음은 행복의 문을 열어 줍니다.  (1) 2010.01.20
희아를 아시는지요?  (1) 2010.01.10
로버트 박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2) 2010.01.03
추워야 따스합니다.  (0) 2009.12.30
백동흠 칼럼 2010. 1. 10. 04:45

희아를 아시는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희아가 누군지 아시나요?


희아가 LA 에 왔었습니다.
밀알 축제에 참여 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희아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삶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희아는 누구일까요? 아름답고 예뿐 배우일까요? 아니면 인기 높은 가수일까요?

아닙니다.
희아는 다운 증후군이었고 손에 손가락이 두 개가 있고 성장이 희박한 기형 다리를 갖고 태어난 선천성 1급 장애아입니다. 그나마 3살 때 그 다리마저 잘라 냈습니다.
이때 엄마는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기도 외에는 사랑하는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다짐했습니다.

희아가 피아노를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입니다.
피아노 하게 된 동기에 대해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만 구부렸다 폈다하는 마디가 있고 세 개는 마디가 없어요. 거기다 손가락에 힘이 없고 뭘 쥐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손가락의 힘을 길러주려고 피아노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능이 낮기에 손가락 운동을 해서라도 머리가 조금이나마 좋아 지게 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런 희아가 지금은 네 손가락만으로 어느 작곡가의 곡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실력을 갖춘 것입니다.
열 손가락이 다 있는 정상적인 사람도 치기 힘들다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것입니다.

희아가 가는 곳에 사람이 모였습니다. 희아가 피아노를 치며 사람들이 눈물을 훔칩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으며 희망을 보게 합니다. 절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환상을 갖게 합니다.
희아는 인간 승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희아의 연주와 엄마의 간증이야기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정신적이고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밖의 신체나 환경적 요인이 절망 같은 상황이라도 정신이 살아 있고 영적 생명이 있다면 이겨 낸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기적은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 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엄마를 통해 사랑하는 딸에게 영감을 주고 재능과 은사가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셋째는 그 위에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루 13시간씩 1년을 연습하고서야 “나비야, 나비야”를 쳤을 정도였습니다.
손이 까져 피가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월간 “소중한 당신” 2005년 9월호에서 고백한 글입니다.
“그건 주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희아는 말 합니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의 장애자가 많아요. 전 그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답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님!

삶이라는 것 어쩜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위대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과 인간 승리를 보여준
희아를 존경하며 격려 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향해 일어나는 우리 모두의 삶을 귀하게 보며 격려 합니다. 자- 우리 힘내지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4:4절) 

 


백동흠 칼럼 2010. 1. 3. 03:23

로버트 박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o Mr. Kim Jong Il and North Korea's Leaders:

I proclaim Christ’s love and forgiveness towards you today. God promises mercy and clemency for those who repent. He promises forgiveness for every sin and re-birth through the Holy Spirit for those who believe Christ died for the atonement of all their sins, as a sacrifice from God, given in love. He is the true and living God. He loves you and wants to save you and all of North Korea today. Please open your borders so that we may bring food, provisions, medicine, necessities, and assistance to those who are struggling to survive. Please close down all concentration camps and release all political prisoners today, and allow care teams to enter to minister healing to those who have been tortured and traumatized.

All we are asking is for all North Koreans to be free, safe and have life.

With Love, Respect and Goodwill Towards All People,

Robert Park
12/25/2009

28세의 한 젊은이가
2009년 성탄절날 새벽 5시 경 북한 회령 당원리에서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죽으러 간다. 나의 죽음이 북한의 고통 받는 사랑하는 백성들을 해방하게 하는 하나의 밀알이 되기를 소원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렇게 들어갔습니다.
이때 자신의 가슴에 품고 간 편지가 위의 글입니다.
그 추운 날 북한의 백성들이 낡은 옷을 입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따뜻한 자신의 방한복을 벗어 버리고 낡은 그들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그 길을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 당당하게 들어갈 때 국경을 지키는 북한 병사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왜 침묵하고 있는가?
"700만명이 지금 북한에서 굶어 죽고 있으며 25만 명이 학대와 고문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어 가는데도 왜 한국과 한국 교회 그리고 국제 사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
23일 서울에서 로이터와 가진 인터뷰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북에 들어가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전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지금 전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념이나 사상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젊은이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 에 대해 신선하게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자체가 이 살벌하고 추운 이 땅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행위이었습니다.
그분이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게 한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명한 것이 한 알이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복음임을 선포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너무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들의 땀과 눈물의 부요 위에서 안주하고 탐닉하며 비젼과 꿈이 없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28세 된 한 젊은이를 통해 희망을 보았습니다.
우리 어른 세대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미래의 정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 하나 죽어 저들이 살수 있다면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살아 있는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그 땅에 임할 때까지 침묵해선 안 됩니다.
한 젊은이와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진정한 인권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가 존중 받는 그 땅이 되고, 탈불자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 가, 서로 얼싸안고 행복한 가정을 세우기 까지, 그리고 그 땅에 여호와의 경외하는 것이 바다에 물이 넘치는 그 날까지, 제2, 제3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어나야 하며 일어나도록 기도하며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새해가 밝고 희망차게 보이는 것은 사랑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이 계시고 아직도 우리 주변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 2010년 송구영신 예배 설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