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6. 3. 2. 11:46

삼일운동과 독립 선언서의 도전을 받았으면 합니다.



삼일운동과 독립 선언서의 도전을 받았으면 합니다. 

                                             백동흠목사 

1918년 일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 주의의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식민지상태의 모든 나라들이 독립의 기대감이 물결같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초에 파리에서 전후 새로운 국제 질서를 위한 강화조약이 열렸습니다. 
이때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규식이 2월 1일 파리로 들어갔습니다.
1월 21일 고종 황제가 돌아가심으로 백성은 의분이 하늘에 사무?습니다.
2월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이 있었고
3월 1일 이런 분위기에서 온 민족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33인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보성사에서 2만 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 배포됐습니다.
그리고 3월1일 일제이 전국각지에서 삼일절 노래가사와 같이 
기미년 3월 1일 정 오후 터지자 밀물같이 대한 독립 만세 
외쳐지기 시작한 것이 삼일운동입니다.

이때 독립 선언서는 선포된 것입니다.
독립 선언서는

첫째 대한의 독립과 자국민국임을 선포합니다.

둘째 우리 민족이 품는 것은
시대의 양심, 정의의 군대, 인륜과 도덕성의 의지임을 
분명이 합니다.

셋째 미래의 세계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향하여 갈 것임을 다짐합니다.


마지막 마무리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도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까고 다듬어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우리는 본시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누릴 것이며
독창적 능력을 발휘할 것이며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을 피우리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니
즐거운 부활에 이를 것이니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이 독립 선언에 기초한 삼일 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 져진 것입니다.

삼일 운동의 정신은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권과 인류애 그리고 평화와 도덕성의 정신입니다.


독립 선언문에는 일본의 신의 없음을 탓하려 함이 아니요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려 함이 아니라고 분명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길이 대한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가 되며 세계 평화로 가는 길이며
인권과 인류 복지로 가는 길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둘째는 비폭력적 평화의 투쟁정신입니다.

삼일 운동 시의 지침이 세워 졌습니다.(기독교인 대상으로)
①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 것 
② 돌을 던지거나 주먹을 치는 등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③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지낼 것
매일 3시에 기도 시간을 정하고 주일은 금식을 하며
(월) 이사야 10장 (화) 예레미야12장 (수) 신명기28장 (목) 야고보5장
(금) 이사야59장 (토) 로마서8장을 읽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폭력을 비폭력으로 맞섰고 무력을 평화의 소리로 대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총칼 앞에서 피를 흘렀고 죽음으로 갔지만 

하나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피는 하늘에 닿았고
죽었지만 산자가 되어 역사 속에 위대한 정신사를 흐르게 했던 것입니다. 

셋째 세계인의 정신적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삼일 운동을 지켜본 런던의 기자 맥켄지는 
Korea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에서
한국 국민의 평화적인 항일 봉기는 세계적인 하나의 경이였다고
말했습니다. 
삼일 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운동, 이집트의 반영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의 흑인 인권 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삼일 운동은 세계사의 정신적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삼일정신과 독립선언서를 잘 분석해 보면
그 흐름과 맥은 성경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당시 한국 민족 2000만 명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25만 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내세울 것도 없이
그 정신사의 흐름을 주도해 나갔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세대에도
물량주의적이고 괘락과 욕심으로 가득차고 폭력으로 
물들게 하는 이 세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무리입니다. 
삼일정신을 이어 받아 정신사의 흐름의 물줄기를 바꾸어 낼 수 있는 사람
뛰어난 도덕성과 평화의 가치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작은 무리 일 것입니다. 
토인비도 창조적 소수의 무리에게 내일의 역사를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그 작은 무리안에 그대가 있고 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오늘 삼일절을 맞이하여 위대한 삼일정신을 
도전 받았으면 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6. 2. 3. 01:07

최소량의 법칙에 대해 아시는지요?



최소량의 법칙에 대해 아시는지요? 

                                     백 동흠목사 

어느 형제분이 있습니다.  
근면하고 강직도 합니다. 그리고 재능도 있고
봉사도 잘 합니다. 그런데 혈기가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욱하는 성격으로 인해 항상 베풀어 주고도 마음을 얻지 
못하고 섬겨 주면서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욱하는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려합니다.
아하- 저것이 형제의 한계구나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최소량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최소량의 법칙은 독일의 식물학자 리비히(Libihi)가 
제창한 법칙입니다.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법칙입니다.
식물 성장의 3대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질소와 인산과 칼리입니다. 
이 세가지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그 하나의 부족한 부분까지만 식물이 자라고 
성장이 중단되는 현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른 두 가지가 넉넉하게 충족 되여도 그 이상은 성장이 
중단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소량의 법칙입니다.(Law minimum)

최소량의 법칙 안에는 3가지의 불행한 법칙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낮은 한계의 법칙입니다.

저수지의 둑이 낮으면 낮은 만큼만 물이 차게 되는 
한계의 법칙입니다.  여기 양동이가 있습니다. 
중간에 못을 쳐서 구멍을 냈습니다. 그러면 그 양동이는 
그 못 구멍을 낸 곳 까지만 물이 차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축복의 물이 가득 차게 채워 주어도 
물이 줄줄이 새기 때문에 그 이상 축복을 누리며 
살 수가 없습니다. 
최소량의 법칙 안에는 그 이상 물을 채우지 못하는 
낮은 한계의 법칙이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는 설익은 밥의 법칙입니다. 

김이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이 새면 밥이 설익게 됩니다. 
잠언에 보면 말을 함부로 하면 생명이 새어 나간다는 
뜻이 있습니다.(잠13:3) 
말이든 행동이든 나의 가장 취약점에서 김새게 하므로 
삶 자체를 설익은 밥이 되게 하는 현상이 최소량의 법칙 
안에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셋째는 묻혀 버린 재능의 법칙입니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는 3가지의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질소와 인산과 칼리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만 부족해도 나머지가 
아무리 많아도 효과 없이 성장 자체를 중단되게 만듭니다. 
여기서 최소량의 법칙이 생긴 것입니다. 
어느 분은 혈기 하나로 인해, 
어느 분은 거짓말로 인해,
어느 분은 교만덩이 하나로 인해 
그 아까운 재능과 은사가 외면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질소 하나가 부족한 것으로 인해 인산과 칼리는 
아무 쓸모없는 재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나의 최소량의 것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낮은 부분의 품격을 다지며 
삶의 기본 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이 새게 하는 낮은 수준의 뻥 뚫린 구멍이 무엇인지
항상 김새게 하여 설익은 밥이 되게 하는 
나의 언행심사가 무엇인지, 
그 하나로 인해서 좋은 재능과 은사들조차도 외면당하며 
무시당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욱하는 혈기가 있는 그 형제는 어느 좋은 자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그 후 사랑하는 아내로 인해 욱하는 성격이
메꾸어 집니다. 
기본적인 인품이 다져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혈기가 없어지니 그의 봉사와 섬김이 살아납니다. 
욱하는 성깔이 없어지니 
사람들이 좋아 하며 부담 없이 다가옵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이제는 위로만 쌓고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낮은 곳의 나의 인품을 다져보고
기본적인 품격을 높였으면 합니다.
이것이 최소량의 법칙이 주는 교훈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31)
160201

백동흠 칼럼 2016. 1. 29. 03:37

도덕성은 영적 성향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시는지요?



도덕성은 영적 성향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시는지요?

                                            백동흠목사 

도덕성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12명의 어린이에게 눈을 가리게 하고 
표적물을 맞추게 했습니다.
맞히는 숫자만큼 큰 선물을 주기로 한 시합입니다. 
물론 선물은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상품입니다. 
물론 시합하는 현장에는 감독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어느 어린이는 가리개를 슬쩍 제치면서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눈가리개를 살짝 내리거나
가까이 다가가서 던집니다. 반면 어느 어린이는 
곧이곧대로 가리개를 하고 제 자리에서 던집니다. 

반반으로 나눠집니다. 
6명은 정직하게 던진 아이였고 
6명은 반칙을 한 어린이었습니다.
그 후 이 어린이들의 삶을 추적해보았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도덕성이 낮은 아이의 삶의 모습은 
유혹 앞에서 자제력이 너무 약했고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하고남의 것을 홈치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는 편법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도 부정적 이였고 
공격성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정직한 아이들은 굉장히 낙천적 이였으며 
신뢰도가 강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높았습니다. 
안정감과 성취능력 그리고 경쟁력의 
모든 부분에서 뛰어 났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론은
도덕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행복지수와 성공지수도 
비례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통념적으로 말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
착한 것이 착한 것이 아니다.
사실 저도 종종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첫째 지금 당장입니다. 

눈가리개를 살짝 걷어내고 
아무도 몰래 더 가까이 가서 표적을 맞추는 것이
지금 당장은 유익하고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편법일 뿐입니다.  
익권을 위해 살짝 비리를 덥혀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과 
수단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한다(사 59:8)고 했습니다.

둘째는 멀리 보면 입니다.  

조금 멀리 내다보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미래의 축복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좀 우직하고 강직한 것이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고 
미련한 것 같아도 미래의 저울추는 그런 도덕성의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할 것”(잠 14:11)
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도덕성은 영적인 성향인 것을 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교회는 다니고 있으나 너무나 쉽게 
세속의 흐름을 따라 비도덕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으나 영성은
말라 비틀어 졌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 증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품이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의 성향은
거짓말, 욕심 비리와 편법 등등이 안에 섞여 들어 오지를
않게 되여 있습니다. 이질감을 느껴지게 되여 있습니다. 
토해 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손해 보고 억울해 진다해도 
도덕성의 흐름으로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편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성향이
그쪽으로 흘러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성이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성향에 따라
뛰어난 도덕성의 인품으로 나타나게 되여 있습니다.

이런 영성의 사람이 이 땅에 많아져야  
내일의 역사가 살아나고 
나라와 민족도 희망이 있게 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렘5:1) 

아!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그대가 존귀한 것은 그대 하나로 말미암아 
이 땅이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6. 1. 16. 05:28

소녀상- 또 하나의 한류가 되어.....

 

 

소녀상- 또 하나의 한류가 되어..... 

                               백동흠목사

지난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의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 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닐 것입니다.
소녀상의 이전 문제는 합의문에 없다는 정부의 말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소녀상은 정부 차원의 선을 넘어 섰고
이미 우리 한국의 골짜기를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7월 31부터 8월 10일까지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성노예를 다룬 컴포트 우먼(COMFORT
WOMEN)이 공연됐습니다.
총 18회 공연 중 16회가 매진되고 마지막 공연은
입석 관객까지 허용함으로 성공적이 공연이 됐습니다.
연출가는 한국인 유학생 김현준씨입니다.
나이는 25세 젊은 친구입니다.
그와의 최근 인터뷰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울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위안부(성노예) 사건은 한국의 스토리라고 하기에는
인류애적 사건이 됐음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인터뷰하는 분이 물었습니다.
관객들의 눈물이 일본 정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일까요?
아니면 소녀들에 대한 아픔 마음일까요?
김현준씨는 분명히 말합니다.
소녀들에 대한 아픈 마음이 우선했던 것 같습니다.

김현준씨는 또 이어서 말합니다.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정부 간의 타협의 과제가 아니라
직접 진솔한 사과를 받고 싶어 하는 그 분들의
마음을 읽어 주셔야 합니다. 결코 물질적이거나 제도적인
장치를 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김현준씨의 말에 백번 동의를 표합니다.

아베는 합의금으로 10억 엔을 줌으로
생존 위안부의 마음을 치유한다고 했으며
이것이 마지막 되돌릴 수 없는 합의임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사죄의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아베의 말을 들을 때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일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위안부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성노예라(enforced sex slaves)는 단어가
바른 단어입니다. 성노예가 됐던 소녀상은
이제는 한일 정부의 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작은 골짜기를 벗어났습니다.

뉴저지 주의 유니언시티에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해
시 관계자를 설득할 때 허드슨 문화제단 김자혜 대표는
이렇게 설득을 했습니다.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세계 여성의 보편적인 인권 문제이다”
그 후 소녀상은 맨해튼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있게 됐습니다.

이미 소녀상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질서인
인류애와 인권을 위해 최전방에 서서 열방의 땅 끝에 가서
앉기 시작했습니다.

성노예 소녀상은
또 하나의 한류가 되어
지구상에 반인류적이고 인권과 생명을 유린하는
열방의 땅 끝에 가서 앉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옆의 빈자리 하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인종과 백성과 방언을 초월하여 내 옆에 앉자고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을 느껴 보자고 합니다.
더 이상 이런 범죄가 재발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비둘기 한 마리를 키우며 인류 70억의 마음에 조용히
자리 잡고 앉아 이 땅을 지켜내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6. 1. 6. 05:58

밥같은 사람이 좋다.

           백동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밥이
보기에도 좋다.

매일 먹건만
하나도 물리지 않고

전혀 맛 색깔도
없는데 맛이 있다
 
섞여 들어가서
반찬의 맛을
살려 주는 밥은

물에 들어가
스스로 풀어지면서
구수한 숭늉으로
살아난다.

항상 만나도
물리지 아니하고

먹은 후
포만감을 주어
든든하게 해 주는
밥 같은 사람이 좋다.

숭늉 같이
구수한 사람이
너무나 좋다.

***
꽃처럼 웃고
새처럼 노래하고
구름처럼 자유롭고
하늘처럼 평화로웠으면....

기독문협의 장정숙 권사님이 보내온 새해
카드 내용입니다.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자연과 벗 삼고 그 속에서 웃고 노래하고
자유와 평화를 배웠으면 합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여전히 빛같이 사는 그대의 모습이 왜 이리 아름다운지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백동흠 칼럼 2015. 12. 23. 04:44

Merry Christmas와 Happy Holidays의 전쟁

Merry ChristmasHappy Holidays의 전쟁

                                                       백동흠목사

2010년까지만 해도  Merry Christmas가 데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Happy Holidays의 사용이
조금씩 많아지더니 올해는 Merry Christmas 소리 듣기가
생소해 지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Happy Holidays는 추수감사 절기를 시작하여 성탄과 새해까지를
휴일의 날들을 통틀어서 휴일의 절기에 행복하시라는 인사입니다.
Merry Christmas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인사입니다.
그러기에 두 가지를 병행하며 사용하는 것에 대해
큰 무리를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Merry Christmas 라고 하는 흔적을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Happy Holidays를 사용하게 하는데서
크리스마스 전쟁이란 단어가 붙게 된 것입니다.

동기는 Freedom on Religion(신앙의 자유)라는 법안이
오바마 정부를 통해 통과되면서 종교 분리의 원칙과 맞물려 묘하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자유만 역차별이 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정부는 미국 안에 있는 모든 기독교적 절기들에 대해
일반적인 “Happy Holidays” 를 사용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나, city hall, community center 같은데서 오랫동안 행해졌던
크리스마스 행사, 연극, 연주회 등에서 예수님의 탄생이나 크리스마스가 표현된
행사에 대해 무신론 단체나 인권단체 혹은 이슬람 단체들의 소송을 걸고
승소하게 함으로써  Merry Christmas가 점점 미국 사회에서
사라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몇 가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지도자의 선택이 중요 합니다.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의 지도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이 필요 합니다.
목사 하나의 타락의 소식이 만 명의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평신도 한 사람의 타락이 천명의 사람을 실망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모의 타락과 이혼이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자녀들을 결정적으로 교회를 떠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이 절실할 때입니다.

셋째는 무신론의 세력은 얼마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무신론 세력은 1.6%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에 덧에 걸린 무신론자들이다.”
“거짓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 자신과 가족들에게 정직해 지라고 권면하고 싶다.”
“이 절기의 즐거움과 가족 진구 사랑은 이미 과거의 신(예수님)과 무관하다.”
“이 절기는 죄책감과 정죄라는 종교적인 짐 없어진다면 더 즐거워 질 수 있다.”
저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교회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범주를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만
내면의 영은 말라비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불과 1.6%의 존재입니다.
다만 골리앗과 같이 거대하게 보일 뿐 사실은 허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지금은 다윗의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더 이상 교회를 탓하거나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성도 한 분 한 분이
다윗으로 무장해야 할 시대입니다.
저는 “각개전투의 시대”가 됐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골리앗은 다윗에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살리고 나라도 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다윗으로 그 삶의 현장을 살아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결국  Merry Christmas는 이길 것이고 온 세계에 편만하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성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이며 미래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대속했고
벰(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했고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셨으며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를 실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동흠 칼럼 2015. 12. 3. 05:15

역사 교과서에는 중요한 몇 가지 요소가 들어 가야 합니다.- 역사교과서④

 

역사 교과서에는 중요한 몇 가지 요소가 들어 가야 합니다.- 역사교과서④

                                       백동흠목사

자꾸 소통을 강조하고 진실을 이야기 하는데
역사는 소통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역사는 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구나 자율과 다양성을 말하는데 역사는 자율도 다양성도 아닙니다.
역사는 이미 과거적 사건일 뿐입니다.
그 과거적 사건을 오늘 어떻게 기록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로 전해 주는가가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일제의 침략의 역사를 왜곡하며 전범의 재판도
수정하려고 합니다.
중국은 동북 공정을 통해서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로 흡수시키고 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주체로 모든 역사를 그 방향으로 맞추고 있습니다.
왜곡을 뛰어 넘어 날조의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은 왜곡하거나 날조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역사를 항상 미국의 위대한 정신과 국가관에
관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의 자녀들도 미국에서 성장했습니다만
미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이 엄청난 것 만 보아도
이를 반증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저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미국의 초등학교 역사책을 보았습니다.
대통령들의 이야기는 꿈이고 희망이 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로 지혜와 용기가 있고 그의 치적과
리더십을 너무 아름답게 기록 되여 있습니다.
루즈벨트는 12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대공항을 거쳤고 2차 대전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대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역사책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루즈벨트를 산업화의 아버지라 정의 내렸고
그가 있었기에 미국과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의 아들들이 지금은 대학원생이 됐습니다.
스스로 미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성조기 앞에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과 민주적 가치를
배우며 누리며 자라게 해준 미국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저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한국의 역사도 함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아쉬웠습니다.

저의 자녀가 앞으로 한국의 역사를 배울 기회가 있다면
이런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서 가르쳐 주었으면 합니다.
   
첫째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역사입니다.

부정적인 것은 가려주고 긍정적 역사관을 심어 주도록 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친일은 친일이고 독재는 독재” 라고 하는 말을
방송을 통해 들으면서 참 많이 속이 상했습니다.
저는 6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보았습니다.
포항 제철 공장이 들어서는 것도 보았습니다.
새마을 운동도 보았습니다.
학교 교정에 충효를 큰 간판도 보면서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일인일기(一人一技) 표어도 보았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외침도 들었습니다.
고속도로를 깔아 일일 생활권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의 어른들이 중동으로 독일로 월남으로 나가면서
배부르게 먹으며 미래의 자녀들에게 희망을 주는 시절을 함께 살았습니다.
“잘 살아 보자” 노래 부르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 시절의 역사의 현장을 자라오면서 배고픈 시절 우리는 이렇게
이겨왔다고 자녀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진실은 진실이고 사실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친일이라고 하며 독재라고 하면서 부정의 역사를 강조한다면
저는 우리 자녀들이 그런 역사를 배우거나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둘째는 후손이 자랑할 만한 선조들의 정신과 투쟁입니다.

반만년의 역사 속에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침략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많은 시련과 수난의 역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시련과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선조들의 정신과 투쟁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먼 친척의 아들은 6.25 남침 때 맨 몸으로 폭탄 하나 들고
북의 탱크를 막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집사님 한분은 켈로 부대원 이십니다.
북한의 상공을 뛰어 내린 용사입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위해서 배고픔과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이 땅을 지켜주신 분들입니다.
온갖 민족의 시련과 고난을 견디며 이겨낸 그 정신과 투쟁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알려 주는 역사 교과서가 되어야 합니다.
다양성이니 소통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할 만한 선조요 민족임을
더 크게 더 멋있게 드려 냈으면 합니다.  

셋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입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 주고
민족의 뿌리가 그 역사 교과서에 그득히 고였으면 합니다.

저도 한국의 역사 교과서를 읽어 보았습니다.
특히 현대사를 보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초라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린 자녀들이 배울 역사 교과서로써의 정체성이
전혀 안되어 있음을 느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치나 할 정도였습니다.
오죽했으면 탈북자중의 한 사람이 이 역사책은
북한에서 배우게 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을까요.

진실은 진실이고 사실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으로 대한민국의 긍지와 민족의 뿌리를
초라하게 하거나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불행으로 느끼게 만든다면
우리나라나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애국하고 애족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국가 정체성을 조사한 통계가 있었습니다.
2030 세대의 젊은 층 가운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사는 것을
포기 하고 싶은 사람이 3명중 1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1/2의 사람이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헬조선이란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지옥 같은 한국(조선) 이란 뜻입니다.
굉장한 국가 비하이고 민족 비하입니다.

세월호의 참사 1년이 지난 후 다큐형식의 영화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제목이 “나쁜 나라”입니다.
자녀 잃은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위로와 도움을 나누는
이 나라를 나쁜 나라로 제목을 부쳤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가 않습니다. (내용이야 어쨌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소통과 다양성의 가치를 내세우면
진실이 왜곡 되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마치 민중을 위한다고 하면서
부정의 역사만을 들쳐 내고
뒤틀린 국가관을 갖게 하면
대한민국의 내일은 절망적이 될 것입니다.

국정이냐? 검정이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지지한다고 묻고 말 할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입니다.

첫째 긍정의 역사
둘째 선조들의 모든 역경을 이겨낸 정신력
셋째는 뿌리 깊은 대한민국의 전통성을 이어 받아게 하는 역사 교과서 입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것도 중요 합니다만
그 역사를 누가 가르치는가가 굉장히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계속)

백동흠 칼럼 2015. 12. 3. 05:07

역사 공부의 목적은 어디에 두나요? - 역사교과서③

 

역사 공부의 목적은 어디에 두나요? - 역사교과서③

                                         백동흠목사

지난 번 박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이때 야당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반론을 제기하면서
“너무 비정상이여서 충격적”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야당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대통령의 말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행촌 이암선생(1297-1364)의 말입니다.
고려 말 왕실이 국정 능력이 상실했을 때 차라리 조정 관료들이
고려를 원나라에 들어 바쳐 통합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국호폐지 입성책동(國號廢止 立省策動)을 원의 황제에게 청할 때
이를 반대하면서 한 말이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하니 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
혼을 잃어버리고서 가히 (나라를) 보존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혼이 잃어버리면 몸이 무너지는  같이
역사를 잃어버리면 나라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민중 운동하는 사람이 좋아 하는 조선의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이 역사에 대해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동포의 가슴에 애국이 울려 퍼질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나라를 사랑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동포들이 하나로 뭉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다.

신채호 선생은 계속 말합니다.
역사를 떠나서 애국심을 말하는 자는
자기 다리를 잘라내고 달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살리고 애국심을 일어나게 하려면 역사를 배우라고 하면서
역사가 나라를 세울 것이며
내일의 민족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세워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정체감입니다.
이것을 뿌리가 합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게 해야 합니다.
그 민족의 뿌리가 혼입니다. 이것이 민족성이고
국민 각자의 정체성이 됩니다.

둘째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긍심입니다.
역사를 배웠다면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 여기까지 오기까지
그 안에 깃들여진 위대한 민족사의 정신이 스며 있음을
알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땀과 눈물 그리고 피로 얼룩진 사연이 있습니다.
견디어 내고 이겨낸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한 민족을 뛰어 넘어 세계인의 정신으로 가게 합니다.
위대한 민족사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평화와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온 세계민을 향하여 섬기는 민족으로
나가게 합니다. 이것이 역사 공부의 목적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가
민족성을 격하시키고
백성의 자존감을 낮추게 하고
우리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불행으로 여기게 하고
우리의 선조들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면
그것은 굉장히 잘못된 역사 교과서가 될 것입니다.

역사 교과서를 앞에 두고
국정이냐? 검정이냐? 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양성도 아닙니다.
국민의 소통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을 강조하는데 역사는 진실이 다가 아닙니다.
야당대표는 아직 만들지도 않은 역사 교과서를
친일을 하고 독재를 미화하며 왜곡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너무 겁먹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역사책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역사 교과서는
몇 가지의 요소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계속)

백동흠 칼럼 2015. 12. 3. 04:56

역사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 역사교과서②

 

 

역사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 역사교과서②

                                     백동흠목사

6.25년 북침인가? 남침인가? 정답 남침이다.
국경일을 전후해서 설문 조사해서 정답 몇 % 맞추었는가?
그래서 역사의식이 없다 있다 평가하는 것을 종종 신문을 통해
보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역사 교육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역사 교육은 현장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땀과 눈물과 피가 스며 있는 역사의 현장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스며 있는 그 당시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런 고난의 현장에서 견디어 내고 이겨 나온
우리의 조상들의 정신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세대 차이를 사탄의 전략으로 간주할 만큼
3세대가 역사의 공감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알게 하라 느끼게 하라 함께 공감하라
그리고 역사의 맥과 뿌리로 이어지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의 근교에 있는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최후의 항전지역으로 절벽의 끝자락에 세워진 요새입니다.
3년 동안 960명이 최후까지 항전합니다만 철옹의 마사다가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때 노예민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으로 죽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은 자유민으로써의 죽음을 선택합니다.  
역사가 요세프스는 그 당시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고고학 발굴 작업으로 그들이 신던 가죽 샌들과 바구니 두루마리 성경
항아리에 남겨진 곡식과 11개의 토기조각을 발굴해 냅니다.
그 당시의 현장을 재현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어린 학생으로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함께 공감하며 느끼게 해 주고 있습니다.
사관생도들의 합숙 훈련의 현장이기도 한 이곳은
이스라엘 군의 훈련의 최종 코스로써 마사다의 정상에서
뼈저리게 절감하면서 이렇게 외치게 한다고 합니다.
마사다의 비극은 더 이상 없다. (Masada Never Again!)
이들은 그 역사를 함께 공유하며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의 역사는 재현될 수 없음을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 코스트를 갔을 때 인상 깊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학살 현장이 그대로 재현 되어 있었습니다.
유품들이 널려 있고 비디오 속에서는 그 현장에서 살아 나온 분들의
눈물 흘리며 전해 주는 이야기들이 흘러 넘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죽은 수천수만의 어린이들의 명찰들이 높고 높은 천장에
마치 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같이 붙어 있고 그 어린 아이들의 이름이
메아리쳐 불려 집니다.
그 현장을 지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복받쳐 오르는 아픔을 느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젊은 연인들이 그리고 유치원 어린이들이 함께 참관하고
나오는데 눈에 눈물 자국이 젖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마 이 어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앞으로 이런 비참한 역사가 재현 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아! 저것이 역사의 현장이구나!
그리고 그 역사의 현장을 어린이로부터 청년 장년에 이르기 까지
온 몸으로 느끼게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역사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그 피와 땀과 눈물을 알게 하고 느껴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과 시련을 견디어 내고 응전하고 이겨낸
그 정신과 노력을 온 몸으로 배우게 해야 합니다.

전에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을 정부의 예산과 조직으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진짜 굉장히)
수많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흠이 발견되면
대단한 보석을 발견한 듯 언론에 공시하고 친일 인사로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고 부관참시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렵고 불행했던 시절을 살던 그 시대의 어른들을
정죄하는 것이 바른 역사 세우기라고 하는 것인지 안타까웠습니다.
과연 그 시대에 세금을 내고 그 밑에서 일하고 동조 했던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금의 자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조상도 없게 만들고
수치스러운 후손으로 전락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한국인으로 서기까지에는
숫한 도전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압박과 핍박 속에서도
견뎌낸 민족이요 이겨낸 민족입니다.  
그 안에 땀과 눈물과 피가 스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응전하며 견디며 이겨 내 주신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 가게 하는 것이               역사 공부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가서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아파하며 공감하며 다져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게 하고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결단과 다짐이 있어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 한 민족의 역사 속에는 이런 위대한 정신의 사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 긍정의 역사를 찾아내고 드러내어 그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여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해 줄 때 비로소 역사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15. 12. 3. 04:36

역사를 왜 배워야 하나요 - 역사 교과서 ①

 

 

역사를 왜 배워야 하나요 - 역사 교과서 ①

                                            백 동흠목사

한국의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능 고시도 힘겨운 데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느냐고 불평이 많았나 봅니다.
한 학생이 선생님께 짜증스럽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선생님이 아무 말도 안하고 “배워야지…….” 하면서 알밤을 때립니다.
“아앗 왜 때려요?”
또 묻습니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냐고요?
선생님은 또 다시 알밤을 딱 때립니다.
“역사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왜 때려요? 왜 역사를 배우느냐고요?”
그 순간 선생님은 또 다시 알밤을 딱 때립니다.
이제는 학생이 싹 피합니다.
그때서야 선생님은 말씀합니다.
“이게 역사다.”
“네가 억울하게 맞은 것을 기억하지 못 했다면
내가 너를 때릴 때 피할 수 있었을까?”
이게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역사는 배워야 해

전도서에 보면 한 세대가 가면 또 한세대가 온다고 했습니다.(전1:4)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전1:9)
새것이라 말하지 마라 오래 전 세대에 이미 있었다고 합니다.(전1:10)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진술하라 말해 보아라. 이전 일이 어떠한 것을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신 32장7절에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일러 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 토인비는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기의 역사학자이며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 한다고 했습니다.
망전 필위 (忘戰必危)을 기억해야 합니다.
잊으면 반드시 그 위험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네가 억울하게 맞은 것을 기억하지 못 했다면
내가 너를 때릴 때 피할 수 있었을까?”
이게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역사는 배워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