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1. 2. 3. 04:54

그래서 푸른편지를 보내드리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푸른편지를 보내 드리지 못 드렸습니다.

                                                                백 동흠목사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계십니다.
퇴원하기 전 가정이 모여 상의 한 결과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반대 했었습니다.
소변도 투브로 받아 내시고 음식도 투브로 주입하시고
몸의 90% 이상이 마비된 상태로 누워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24시간을 옆에서 지키지 아니하면 안 되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효자인 형님은 못 할 때 못하더라도 모시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동의하게 됐습니다.  
형의 두 아들이 너무 성실했습니다.
두 아들을 도움을 받아 24시간 할머니를 지키며 돌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오전시간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6시 20분 어머니에게로 출근합니다.
주무시면 조용히 기다리다가 깨어나시면
손을 붙잡고 기도해 드립니다. 찬양을 해 드립니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정돈하여 드리고
기저귀와 변을 깨끗이 닦아 드립니다.

욕창- 어머니는 몸이 말라 꼬리 뼈 쪽이 볼록 튀어 나왔는데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중에 그 곳의 피부가 다 헤어지고
동그랗게 구멍 뚫리듯이 피부가 패였습니다.
이것이 욕창이었습니다. 저는 욕창을 처음 보았습니다.
움푹 패어서 피부의 내면 층이 보였습니다.
소독을 해 드리고 약을 바르고 가제로 붙여 드립니다.

음식은 배로 들어가는데 음식이 들어가는 부분을 닦아 드리고
소독하여 가제로 붙여 드려야 했습니다.
그 후 몸과 얼굴과 머리를 닦아 드립니다.
맨 처음에는 꼬박 3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2시간이면 넉넉히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시간에 맞추어 투약을 해드리고
시간마다 물도 넣어 드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놀랄 만큼 회복이 눈에 띄게 보였습니다.
얼굴이 평안하고 조용히 잠이 들고 깨어나시더니
긴 꿈을 꾼 것같이 얼굴이 밝아 보였습니다.
조금도 요동하지 않던 왼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귀가 들리는지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습니다.
요 며칠 전에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 들어 온 저를 보더니 뭐라고 중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틀리가 없는 입으로 오물락 거리며 하는 말은
“가서 좀 더 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면 오른손을 들고 흔들며 반가워합니다.
저는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해 드립니다.
어머니는 아멘을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전달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좋은가 봅니다.
누워 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는 손과 발을 보면서
이 험한 세상을 홀로 살기에도 벅찼을 텐데
우리 6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온 몸에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강인한 사랑이었습니다.

참 추운 시절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을 이겨낸 사랑이었습니다.
몸은 외소 하지만 사랑은 거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몸을 닦아 드리고 이렇게 뒷바라지 한다는 것이
제게는 왜 이리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아셨는지 치유하심을 주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눈에 띠게 회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주님이 치료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욕창은 95%이상 다 낳았습니다.
마지막 딱정이만 떨어지면 된답니다.

어머니에게 약속하자고 했습니다.
2월 첫째주일은 휠체어 타고 교회가자고요
그리고 3월 달에는 휠체어 없이 교회가자고요
어머니는 밝게 웃으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다가오는 것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푸른 편지를 성실하게 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