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09. 12. 30. 02:52

추워야 따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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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워야 따스합니다.

                                                  백 동흠목사

몇 해전 3가족의 친구가 빅 베어의 높은 산 속의 산장을 얻어 성탄절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눈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진눈깨비가 섞인 찬비가 주룩 주룩 내렸습니다.
오후 4시 도착했습니다. 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은 썰렁했고 침침했습니다.

우린 전기 불을 키고 히터를 틀고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9명의 자녀들은 들어오자마자 TV 앞으로 가버립니다. 이것이 요즘 아이들의 처세입니다.
우린 벽난로의 불도 지피웠고 장작타는 냄새와 함께 운치가 있어 보였습니다. 이젠 제법 방안이 따뜻해 졌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정신 없이 TV앞에 모여 있을 뿐입니다.

밖은 여전히 찬비가 옵니다. 난 비가 좋습니다. 비는 나의 연인같이 안식을 주며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줍니다.
이젠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간 것입니다.
심한 바람과 폭우로 이 일대의 전기가 다 나가고 만 것입니다.
히터가 나가니깐 갑자기 방이 냉방이 되었습니다. 음식도 가져간 가스버너로 대신하게 됐습니다.

밖과 방안이 온통 깜깜했습니다. 어쩜 온 밤을 냉방에서 지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벽난로의 장작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벽난로의 불이 유일한 온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아이들이 벽난로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우스개 소리를 한 마디하니깐 다들 벽 난로 앞에서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오정 시리즈가 한 바탕 오갔고 자연스럽게 말 짓기 놀이를 하게 되고 369게임으로 이어지더니 가족 노래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은 어둡고 추웠으나 우린 어느 틈엔가 한 가족같이 친밀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벽난로의 따스한 온기 속에서 마음들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 속에 밤이 깊어갔습니다.
어두웠기에 밝았습니다. 추웠기에 참 따스함을 느겼습니다.

11시가 넘어 전기가 들어왔습니다.그리고 아이들은 누가 먼저 일어 났는지 모르게 흩어져 나갑니다. 이렇게 흩어져 떠나는 모습을 보고  어느 부모님이 말합니다.
“차라리 어둡고 추운 것이 더 낳은 것 같다"
“어두웠기 때문에 더 좋은 시간, 따스한 시간을 갖은 것 같다.”
다른 부모님이 맞장구 칩니다.

전 그날 깊음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요함이 오히려 사람을 더욱 삭막하고 빈곤하게 만든다는 것과
둘째는 춥고 가난해야 우리의 삶이 더욱 따스해 지는구나 생각 들었습니다.

밖으러 나왔습니다. 찬비가 진눈꺼비가 되더니 이내 하얀 눈을 뿌립니다.
추웠습니다. 그러나 그 추위가 너무 다정 스러웠습니다.
춥기때문에 따스함을 그리워하고 삶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추워야 따스합니다.


백동흠 칼럼 2009. 12. 25. 04:53

사랑은 세상을 아릅답게 보게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합니다.
         

                                      백  동 흠 목사

광일이라는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동쪽은 안양 재래시장으로 달동네의 모습이었고
서쪽으로는 삼익 맨션아파트가 있었습니다.
양쪽에서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왔는데 한쪽은 귀티가 나고 너무 예뻤습니다.
한쪽은 제대로 얼굴도 씻지 않고 옷도 낡은 모습이고 아주 산만 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어린이 심방을 갔습니다. 한쪽은 심방을 마치고 나올 때 문에서 삐쭉 인사하고 문을 탁하고 닫으면 끝입니다.

한쪽은 문간에서 인사합니다. “안녕가세요?” 또 골목길까지 쫓아와 또 인사합니다. “안녕가세요?” 그리고 시장의 골목을 지나 시장의 끝에 까지 뒤 쫓아 와서 큰 소리로 “안녕가세요” 외치며 인사합니다. 그리고 조금 가다 뒤돌아보면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 달동네 아이들이 좋았습니다.

광일이는 그런 달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의 어린이입니다. 그 집에 가보면 한집에 5세대의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방 한 칸마다 한 가정이 사는 것입니다.
광일이의 아빠는 어디론가 떠나 가셨고 엄마 혼자 시장의 어귀에서 나물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 하고 있었습니다. 형이 하나 있는데 형도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에 일하려 다닌다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 왔습니다. 그 해도 연중행사로써 바빴습니다.
그런데 바쁜 와중에서도 내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생일 선물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갑자기 한 어린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자세히 보니 광일이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성령님의 소원이 떠올랐습니다.
“아 주님께서 이 아이에게 주님의 선물을 준비하라고 하시는구나.”
 확신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아이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 좋아 합니다. 전도사님이 개인적으로 약속까지 하는 것에 대해 너무 황홀하다는 모습으로 그렇게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났습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안양의 중심 상가에 왔습니다. 그리고 비싸지 않지만 아주 좋은 잠바를 하나 입혀 보았습니다. 아이는 “왜 이렇게 하세요?” 을 반문하면서 어색한 모습을 잠바를 입었습니다. 아주 귀티가 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이발소로 데려 갔습니다. 안 깎는다고 합니다. “안 깎으면 맞는다.” 웃으며 협박했지요. 머리까지 깎으니 귀공자 같았습니다. 그리고 목욕탕을 가려 했으나 그날따라 쉬는 날이었습니다. 이제 설렁탕집에 들어갔습니다. 함께 따끈한 설렁탕과 육개장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할 때부터 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아무 말하지 않지만 안으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그 사랑이 안으로 울게 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조용히 교회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교회 제단에 무릎을 끊었습니다.
전 물었습니다.
 “광일아 왜 내가 너에게 이런 것 해 준줄 아니?” 
아이는 머뭇거립니다. 그리고 한 마디 합니다.
“성탄절이니까요?”“그래. 맞아 주님이 나신 날이지. 근데 말이야 난 주님께 더 큰 선물 받았거든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너에게 선물하는 거야?”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데 흐느낌이 있었습니다.
조용히 광일이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우는 것입니다. 전 가만히 품에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이 아이의 마음과 눈물을 주님의 생일 선물로 드립니다.”

그 날 이후 교회에서의 광일이의 모습이 아주 많이 변했습니다.
얼굴이 환하고 태도가 의젓해 지고 예배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전 느끼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 시키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구나 생각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09. 12. 20. 11:14

조급증은 말세의 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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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급증은 말세의 증상입니다

                                      백 동흠목사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이 하루는 학교를 가려다가 등뒤에 있는 엄마에게 멋쩍은 투로 한마디 묻는 것이었습니다.
“ 엄마! 엄마는 아침에 나를 깨우면서 지금까지 빨리 빨리라는 말을 몇 번했는지 아세요?”
“아니 웬 뚱딴지같은 질문을..  그래 몇 번인데..”
“엄만 몇 번일 것 같아요?”
“어휴 빨리 말해봐. 그래야 빨리 가지...”
“또 빨리네.. 그것까지 합해서 스물하고도 네 번예요 스물 네번..”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  빨리
학교 늦겠다 아- 어서...”
“빨/리/가 빨/리/.. 학교 늦겠다. 아- 어/서/.. 어서 까지 합해서 스물일곱 번이에요 스물일곱 번..” 하면서 아이는 “엄마 학교에 다녀올게요..” 하면서 갔습니다.

아이를 보내 놓고 난 후 엄마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배웠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멋과 여유를 갖고 성숙해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맑은 아침햇살과 상큼한 아침 이슬 같은 공기가 새날 아침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정말 난 내 사랑하는 가정에서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자녀에게 기껏 첫 마디가 “빨리 일어나.. 빨리 세수해.. 빨리 밥 먹고 빨리 학교가..”로 시작했구나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여유가 있고 정서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조급증은 말세 문화의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세에 사람들이 조급해 진다고 했습니다(딤후3:4)
도미노 피자(Dmino Pizza)가 성공하게 된 것은 어느 지역의 집에서 피자를 주문해도 30분 안에 배달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회사의 최고 경영진은 “우리는 피자를 파는 것이 아니고 현대인의 요구에 맞추어 시간을 파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24시간 영업하는 데니스식당(Denny)도 현대인의 심리를 헤아리고 “주문을 받고 10분을 넘기면 디저트는 무료”라는 광고를 내 보내고 나서 엄청난 손님이 몰리게 됐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맥도날드도 어떻게 하면 현대인들이 요구하는 “값싸고 간단하고 빨리”(Fast Food)가 세계의 매장을 점유하게 된 것이라고 경영 심리학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도 진행이 빨라야 흥행에 성공합니다. 음악의 템포도 빨라야 합니다.
이런 빠른 속도의 추세는 말세의 인간 심리에 발 빠르게 맞춘 상업술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조급한 말세의 흐름을 벗어나려면 3가지 정도를 관리하면 된답니다.

① 마음의 관리인데 조금 여유를 가져 보자는 것입니다.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14:29)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안달하고 스스로 서두릅니다. 스스로 초조해 하고 스스로 안절부절 하며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② 언어의 관리인데 대화에 조금 여유를 갖자 입니다.

잠 29:20에 보면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너무 심각하지 마시고 웃기는 대화(유머) 덕담의 언어를 사용했으면 합니다.

③ 생활 관리인데 괜히 바쁜 척 하지 마시고 꼭 해야 할 일을 위해 가지치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괜히 바쁜 인식을 스스로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모습을 보여 주여 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무척 바쁘셨습니다. 짧은 3년의 공생애에의 삶이 얼마나 바쁘고 벅찼을까요?
그러나 새벽 미명 조용한 새벽 기도의 시간을 충족히 가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정에서 한가하게 음식을 먹고 마시며 담소하고 즐겼습니다.
때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서 사람을 만나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병든 모든 사람을 다 고치지 못했고 직접 복음을 다 전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 길을 가야 하리니.”. (눅13:33) 하며 자신의 길을 가지쳐가면서 여유 있게 넉넉하게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영성이란 그분을 묵묵히 바라보는 여백입니다.
그분이 나를 통해 살아나게 하는 마음 관리요 언어 관리요 생활 관리입니다.
괜히 바쁜척하면 주님은 들어설 곳이 없답니다.
백동흠 칼럼 2009. 12. 11. 09:12

강한 것이 강한게 아닙니다.



                   강한 것은 따스함입니다.

                                                백  동흠목사


이솝의 우화 중에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더 강하고 힘이 센지 겨누는 내용입니다.
마침 지나가는 한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여 내는가? 시합을 하게 됩니다.

바람은 자신 만만한 투로 내가 먼저 하겠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강한 바람으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고 강한 바람을 불어 댑니다.
그러나 바람이 심하게 불수록 나그네는 더 강하게 자신의 외투를 움켜잡았습니다.
결국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를 못했습니다.

이번에 해님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겠다고 하면서 따뜻한 햇볕을 나그네에게 조금씩 서서히 내려 쬐이게 했습니다.
나그네는 안으로 몸이 뜨거워지니깐 자신도 모르게 두툼한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과 해님의 싸움은 해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때 해님이 바람에게 한 마디 합니다.
“여보게 바람씨?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정말 그런 것 같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지요?  
풍랑 이는 거친 바다를 다스리는 것은 강한 폭풍우가 아닙니다.
아주 고요하고 잔잔한 미풍입니다.
삭막하게 굳어져서 얼어버린 대지을 녹이는 것은 따스함이고
순이 돋고 꽃이 피게 하는 것은 강한 삭풍이 아니라 따스한 기운입니다.

우리 알아야 할 것 몇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강한 것이 강한 게 아닙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숭배합니다. 강해야 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똑똑해야 하며 있는 자가 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앞서가려고 하며 높아지려고 합니다.
자신의 약점과 부족은 감추고 자신의 잘남과 강함을 은근히 드려내며 자랑하며 과시하고자 합니다.
나는 잘나야 되고 나는 똑똑해야 하며 훌륭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하며 높임 받아야 합니다.
아니 나야 이제 그렇다 치더라도 내 자식만은 내 남편만은 잘나야 하고 똑똑 해아 하며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이며
그것을 강요하며 사는 것이 내가 아닌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높아지면 낮아진다고 했습니다.
강하면 부려지기가 쉽습니다.
똑똑하면 숨이 막힙니다.
오히려 강한 바람은 더 강하게 마음을 강퍅하게 다져먹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정 강한 것은 부드러우며 따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같이 다가 오셨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사53:2)  
자꾸 따져 묻지도 않았습니다. 부드럽고 편하게 있는 그대로 포옹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울어 주고 함께 먹어주고 대화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겨주고 웃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습니다. 치료를 받습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조용히 주로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사람마다 마음의 깊이가 다릅니다.
얼마큼 웃어 주며 얼마큼 받아 주는가? 얼마큼 포옹하며 얼마큼 깊이 품어 주는가?
그 마음의 깊이와 넓이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진정한 강한 사람은 밖의 환경이나 사람에 흔들림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며 여전히 믿어주며 여전히 견디어 주는 폭과 깊이가 깊은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도종환님의 “깊은 물”이 생각이 납니다.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하나 뜨지 못 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 배하나라도 뜨는가?
.....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소리 없이 조용히 깊이 흐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백동흠 칼럼 2009. 11. 29. 08:27

김 다울 - 삶의 무게에 얼마나 아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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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선 모델"  김 다울, 삶의 무게에 얼마나 아팠을까 ?

                                                                               백 동흠목사

김다울은 11월 20일 오전 프랑스 파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13세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에 능했던 故김다울은 샤넬, 루이비통, 돌체앤가바나 등 세계 유명 브랜드의 런웨이에 오르며 세계 시장에 진출한 최연소 한국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2009년 NY매거진 ‘주목해야 할 모델 탑10’에 선정 되기도 했습니다. 세계적인 패선 모델 김다울(20세, 프랑스 파리거주)의 자살이후 왜 톱 모델이 자살이 많은가? 에 대한 기사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모델 하니깐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전에 예쁜 콘도 하나를 샀습니다.
이 집의 주인이 30대 초의 모델이었습니다. 방안에 헬스머신이 가득 있고 방안이 거울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델 사진을 걸어 놓았는데 정말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였습니다. 방안 구석구석을 예쁘게 장식해 놓은 것이 귀티가 났습니다. 
그녀는 혼자 살았고 남자 파트너가 모든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남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홀로 무거운 삶의 무게에 눌려 살았습니다.
잠들 때는 눈가리개를 하고 창문을 완벽하게 2중의 커튼으로 차단하여 빛 한 점이 들와서는 안 되고 약을 복용하고 나서 잠이 들었습니다.
현관 방문과 아래 차고(Garage) 들어가는 문이 부셔진 흔적이 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종종 심하게 싸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신경이 예민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모델로써의 30대 초반의 나이에 한 계를 느끼고 항상 불안과 절망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쓰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코마 상태로 병원에 있고 급히 집을 팔고 싶어서 내 놓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다울 자살에 대해 소속사는 “세계 정상급 모델이 된 뒤 하락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6월에도 모델 루슬라나 코슈노바(22살)도 맨해튼의 자기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는데 자살 전의 그의 일기에는 화려한 모델 뒤의 고독감을 하소연 하고 단 한 사람으로 부터라도 진정한 사랑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2008년 10월에도 한국의 유명 모델 김지후도 “나는 홀로다. 삶이 몹시 외롭다. 그리고 모든 것이 힘겹다. 벗어나고 싶다” 는 고백과 함께 목을 매었습니다.

모델 출신의 자살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의 길을 견디어야 합니다.
둘째는 막상 정상에 올랐을 때의 영광은 짧고 무대 뒤편은 몹시 공허하고 허전합니다.
셋째 그 후 정상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얼마나 어려운지 겉으로 웃고 안으로 운답니다.
넷째 그 한계를 느낄 때 오는 두려움과 절망감은 아무도 모르게 홀로 견디다가 안으로 무너지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특징이 어디 모델들에게만 있을까요?
인생은 누구나 이런 삶의 무게에 눌려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진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베드로도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 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들어 가는 풀의 꽃같이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가 되어 죽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절여 왔습니다.

어느 무명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떨어져 내린 꽃잎 하나가 아프다
어느 생의 찬란했던 눈부심도
한 순간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을
.....
가지에 매달려 피었다 져 버린
마른 빈 땅에 내린 울음들이 아프다
남은 빈 가지엔 바람소리
아득한 아픔만이 가득하다.”

오늘도 새벽 기도의 시간 둥그런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내가 나를 보며 울었고 성도를 보며 울었습니다.
눌려서 살다간 어린 자매 다울과 인생 모두를 보며 마음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백동흠 칼럼 2009. 11. 22. 10:24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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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 맺는 열매입니다. 

                                                        백 동흠목사

나의 집에 전기가 들어 온다면
이 지구상에 전기 혜택을 입지 못하는 사람 20억명의 사람보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 맑고 깨끗한 수도물이 들어 온다면
10억의 사람보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한끼의  따끗한 밥을 온 식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8억명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보다 더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주의 교회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체포와 학대와 죽음의 공포속에 있는 30억명의 사람보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 안에 먹을 음식이 있고 따뜻한 옷으로 몸을 걸 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75%의 사람보다 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일고 내가 축복 받은 존재인것을 안다면은
이 세상에 글을 읽지 못하는 20억명의 사람보다 더 많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2006년도에 영국의 생크 탱크인 신 경제 재단(NEF)에서 나라별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미국의 150위, 영국이 108위, 일본이 98위로 나왔습니다.
한국도 행복지수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102위입니다.

그러면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남태평양 호주 근방의 섬나라 비누아투라는 20만명이 사는 아주 작은 나라었습니다.

지난 5월에 한국에 그 나라 관광청장이 방문했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 어떻게 그 나라 국민은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 바누아투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지요. 그리고 항상 서로를 나누어 주고 존중히 여겨주는 생활에
익숙할 뿐입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소유는  바닷물 같이 마실 수록 갈증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우리의 행복을 좀먹는 벌레와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미래의 번영을 키우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의 절기에 진정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으면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내일을 참 좋은 날 주일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며 "큰 감사 간증의 날"로
전 성도 간증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세요 환영합니다.

백동흠 칼럼 2009. 11. 18. 04:11

감사는 미래의 번영을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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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는 미래의 번영이 자라게 합니다.

                                                          백 동 흠목사


1. 청교도들의 역사

청교도라는 언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564년 경 교회의 강력한 힘을 가진
영국의 주교들이 그들의 관구 승려들에게 영국교회의 기도서와 예배의식, 승려예복
등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이에 대한 거부한 무리들을 청교도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란 제 1차적으로 영국교회(앵그리칸이즘)을 배격하고 더 나아가서 카톨릭을
배격하려한 16~17세기 영국의 신교도 일반인들을 칭하여 청교도라고 했습니다.

청교주의가 내세우는 종교의 보편적 진리는 형식보다는 내면을 강조하는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종교의식의 절차를 화려하게 꾸며놓고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따르는 사람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믿었습니다. 결국 박해를 받은 이들 청교도들중에 몇 사람(146명)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1620년 신대륙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2. 청교도들과 추수 감사절의 유래
1620년 180톤의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시속 2마일의 속도로 117일간의 운항속에 신대륙 플리머스 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날이 12월 26일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
향토병으로 죽은 사람이 44명이나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극에 달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믿음으로 그해 겨울을 이겨냈습니다.
그 해 봄 가져온 밀과 보리의 씨앗을 심었으나 실패했을 때 그 지역 인디안의
도움으로 옥수수, 감자, 호박, 햇곡식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인디언들을 초대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감사절을 지킨 것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된것입니다.

이때 이들이 감사한 것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이곳에 올 수 있는 작은 범선이나마 주신 것을 감사
둘째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맞아 큰 돗이 부러 졌고 몇 자매님이 심한 파도에 휩쓸렸으나 무사히 구출된 것을 감사
셋째 항해 기간 중 두 명이 죽었으나 새 생명 새 아기가 태어남을 감사
넷째 117일간 3개 월동안 고통이 심했으나 결코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음에 감사
다섯째 첫 겨울 비록 몇 분이 죽었으나 죽음의 겨울을 이긴 것에 대한 감사
여섯째 좋은 원주민 친구들을 만나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3. 감사절의 시작
그 후 3년 후 메사추세츠의 주지사 월리엄 브래드퍼드는 감사절을 제정하여
선포합니다.
“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선포합니다.
주후1623년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온 가족이 다함께 교회에
모여 예배하며 이 모든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선포 합니다.”

그후 각 주마다 추수 감사절을 지내오다가 링컨이 대통령 된 후 마침내 국경일로
제정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의 경건한 조상, 청교도들이 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신앙의 유산을
우리의 후손들이 잘 계승하도록 이 날을 국가 축제의 날로 선포합니다.”

그 후 역대의 대통령들은 이 날에 온 백성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메세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그들이 그 땅에 첫 발을 디딘 후 세운 첫 번째 것이 하나님의 교회 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격이 되었을 까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많은 형제와 자매가
고통 속에 죽어야 했고 이 낮선 땅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향한 신앙과 예배의 정신! 이 한가지 이유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드린 예배의 감격은 켰으며 그들의 드린 감사의 예물을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기초는 이런 믿음과 감사의 예물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믿음과 감사의 뿌리가 미래의 이 땅을 번성하게 한 정신사의 흐름인 것을 후손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한 개인의 미래를 번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미래를 번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한 나라도 미래의 번영을 불러오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
올해 부터 정말 감격스런 감사의 예배가 이번 추수 감사 주일부터
드려지게 되기를 기대해 보고 싶답니다. 아멘이지요?

백동흠 칼럼 2009. 10. 22. 15:09

그 사랑이 샘이 되여 솟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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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그리워 집니다.

                      백 동흠 목사

김용택님의 시 한편이 참 좋았습니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럽기만 합니다.
(중략)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 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중략)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한
열린 마음 닫아 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 보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빗장)

살면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기성인간이 되여
점점 마음이 차게 굳어지는
나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슬퍼집니다.
시릴 만큼 그리워지는 “당신의 얼굴”이 있는 마음이 행복합니다.

어느 노(老) 철학자의 이야기입니다.
늙은 할머니가 길에 쓰려져 있었답니다.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다가가
“할머니? 괜찮으세요?”
일으켜 세우는 순간 놀았답니다.
할머니의 얼굴이 홍조가 일고 기쁨으로 가득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 철학자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계세요?”
할머니의 답은 단순했습니다.
“난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노(老) 철학자는 중얼거렸습니다.
“내 평생에 그렇게 학문을 하며 애쓰며 찾은 것이 저런 얼굴인데...”
그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주님을 영접한 분이
평화 철학자 러셀의 스승인 화이테드였습니다.

정말 할머니가 품었던 그런 사랑이 그리워집니다.
환경 속에 사랑할 만한 사람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의 사랑이 있어 그 사랑이 샘이 되여 흐르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임을
시로 쓰는 사랑의 시인이 되고 싶답니다. 샬롬!

백동흠 칼럼 2009. 9. 26. 06:35

진정한 부요는 나눔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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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부요는 나눔에 있습니다.            

                                                                         백  동흠목사

한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땅과 돈을 물러 받았기 때문 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집 옆에는 초라한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사업을 하는데 항상 부지런하고 자신의 사업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부자는 늘 그 사람을 비웃으며 무시했습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여유 있는 척하며 자신도 별로 못 살면서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괜해 생색이나 내는 꼴하며...”하며 굉장히 기분 나빠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땅과 호화로운 집을 보면서 오늘 하루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온 그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 집은 부자가 맞지요?”
“그럼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부자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니?”
“아버지 제 생각에는 우리 옆집이 더 부자인 것 같아서 물어 보는 것예요.”
아들은 말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 아니 애야 네가 보다 시피 옆집은 집도 초라하고 보기에도 볼품이 없지 않느냐?“
부자 아버지는 기가 막힌 듯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옆집 아이를 보렴. 옷도 항상 떨어져서 기운 옷을 입고 다니지 않느냐?”
아들이 답합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오히려 자기 엄마가 기워준 옷을 좋아하며 오히려 자랑하고 다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집 창고를 봐라 창고 안에 없는 것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쌀도 항상 풍족하게 있지 않느냐? 그런데 그 옆집은 그나마 있는 쌀도 남에게 다 주고 없어서 쩔쩔 매고 있지 않느냐?” 라고 부자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그 다음 나온 아들의 대답이 걸작 이였습니다.
“ 아버지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우리 집은 쌀이 그렇게 많아도 남에게 줄 쌀 한 톨이 없는데 그 집의 창고는 거의 없어도 항상 남에게 줄 쌀이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 집이 정말 부자인가? 해서 물어 보는 말이에요.”
아들의 말을 듣고 부자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부자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부요를 얼마나 보람 있게 사용하며 쓰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록펠러(J. D. Rockefeller)는 말하기를 "가장 가난한 사람은 돈밖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요즈음 금융환란이다해서 너무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돈 돈 돈하면서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내면의 마음에 기름지고 가정의 생활에 정서적이 되고 만나는 사람에게 따스함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부요는 어려울 때도 항상 여유로움과 있음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삶입니다.
정말 그대는 진정 부요한 사람인가 아니면 각박한 사람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백동흠 칼럼 2009. 9. 4. 09:39

스스로 속는 삶을 살아선 안되겠지요?

 

         스스로 속는 삶을 살아선 안 되겠지요?

                                                                               백  동흠목사

여기 스스로 속이므로 오는 비극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체중이 줄고 몸이 몹시 피곤해져서 어색하게 자신의 친구의사에게
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진단은 뜻밖의 간암 이였습니다.
그것도 말기 암이었고 한 달 여정의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의 전공이 암을 전공한 사람 이였습니다.
암을 전공한 이 사람이 암에 걸린 지 3년이 되었고 6개월 전만 알았어도
치료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암을 전공한 의사였습니다.
암에 대해 논문을 썼고 암에 대해서 세미나를 했고 많은 사람을 진찰했고
처방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예외인줄 알았습니다.
스스로는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확신했고 그렇게 믿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와서 뚜껑을 열어 보니 치명적인 문제는 자신 안에 있었습니다.

아! 스스로 속는 자의 비극이 여기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스스로 속는 자의 비극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7:22-23절의 말씀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그 때, 내가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첫째 주님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답니다.
둘째 마귀를 쫓아냈답니다.
셋째 많은 기적을 보여 주었답니다.
그래서 스스로 굉장한 줄 알았습니다. 훌륭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는 나와 전혀 관계없다.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내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대단히 여겨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에 가서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랑한다고 했으나 사랑의 이름으로 오히려 괴롬을 주었습니다.
관심을 가져 준다고 했으나 이건 관심이 아니라 간섭 이였습니다.
위로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번뇌의 위로자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다 자신의 익권을 위함에 불과하였습니다.

스스로 속는 것까지는 괜찮을 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아뿔싸”  늦음의 때,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말기 암의 환자가 된 전문의와 같은 상황이 내 삶이 되선 안 되겠지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첫째는 생명과 성향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질이 내안에 스며 들어와 내가 그런 질의 흐름으로 변형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질의 흐름으로 인품과 삶의 내용이 주님의 형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엡4:13,15)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은 생명의 성향이
나를 포도나무의 열매를 절로 맺게 하는 삶과 인격의 모습입니다.(요15: 4)

둘째는 세속의 질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세속이 들어와 있습니다. 마치 술이 내안에 들어와 술로 절여 있는
체질이 된 사람같이 세속의 질에 절어 있습니다.
이 세속의 질이 내 안에서 자꾸 속아 내여 져야 합니다.
깨어지고 죽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고전9:27)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 세속과 사탄의 영향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이겠지요. 흠과 티도 없이 주 앞에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벧후3:14)

이제 조금 있으면 지남철이 철의 성분을 끌어 당겨 올라가듯
성령님께 성령의 질의 성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 당겨 데려가실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맡24:40-41)
경건의 모양만 치장하고 있다가 스스로 속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오늘 우리의 세대는 종말의 현상이 보편화 되고 있습니다. 
많이 패역해 지고 있습니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러고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성의 진리가 되어 전혀 문제로 느끼지 못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를 두고 성경은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라”(롬12:2)
                                                                  - 밸리 코리안 뉴스 2009.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