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칼럼 2014. 8. 9. 07:34

선교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과 전도사님입니다.

지붕위의 사람도 반가와 해주며 전도지를 받아 줍니다,

                   다들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며 복음을 받아 들입니다.

 

                               이이돌 형제와 함게 몃있는 댄스를 합니다.

                                    헤맑은 오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밀가루를 덮어씨우며 물총 놀이도 합니다.

                        현지 목사님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과 함께 쩍었습니다.

              멕시칼리 한인 교회의 여선교회가 오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현지 멕시코 목사님들 입니다.

           금방 배워서 따라하는 어린이들 입니다. 너무나 좋아 합니다.

         두 아들이 어린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보기가 좋았습니다.

        저의 뒷쪽의 어린친구들이 고개를 내민 것이 너무 다정 스럽웠습니다.

                             어린 친구의 부모님이 십니다.  

 주민들에게 나누워 주기 위해 쌀, 콩, 설탕 그리고 여려가지 물건을 담는 중입니다.

                                  보육원의 어린이들 입니다.

선교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백 동흠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매주 강단에 꽃을 장식하였습니다.
주일 예배를 위한 거룩한 꽃입니다.
성도님들이 가정의 경조사를 통해(생일, 추도 결혼기념일 등등)
강단에 꽃을 장식하여 왔습니다.
그렇게 장식하는 꽃을 불우한 어린이를 도우면
주님이 더 기뻐하지 않을까 성도들의 의견이 모아져서
“영적 헌화”라고 하는 명칭으로 헌금으로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영적 헌화의 금액은 20불로 정하고 새해 첫날 영적 헌화표를 만들어
가정의 경조사를 통해 작성하게 했습니다.
올해는 멕시칼리의 고아들을 위해 영적 헌화 헌금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마침 청운 교회를 담임하는 이명수 목사님과 대화중에
목사님이 학생들과 함께 멕시칼리로 단기 선교를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돕고자하는 멕시칼리 고아원이기에
장로님들과 상의 한 후 저도 함께 가기로 한 것입니다.
저의 두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멕시칼리는 멕시코의 바하 칼리포니아의 주의 수도였습니다.
인구는 90만 명이 거주하고 있고
우리가 간 곳은 미국과 국경을 한 멕시칼리의 국경지대 이었습니다.

양철 같은 것으로 담을 쳐서 국경선이 되게 했습니다.
국경선을 끼고 찻길을 달리는데 선교사님이 말합니다.
아직도 이곳의 사람은 미국을 선망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일해야 12불정도 벌이가 된다고 합니다.
저 담만 넘어가면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에 12불의 벌이가 되기에
그렇게 미국으로 넘어 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멕시칼리는 문자 그대로 한증막이었습니다.
120도 되는 그런 무더위였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국경을 넘어 멕시코에 들어오니 한국의 60년대의 풍경의 모습이었습니다.
집들이 왜 이리 허름한지 빈집들 같았고
전쟁 통에 부셔진 집들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의 말을 들어 보면
사람들이 땅을 사고 그 위에다가 벽을 치고 창문을 만들고
문짝을 달고 집을 져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데로 조금씩 집을 짓다 보니
2년도 걸리고 5년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도독이 들어와 창틀을 빼가고 문짝을 홈쳐 간다고 합니다.
12불씩 버는 돈으로 언제 그 집을 지을꼬?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마치 60년대의 하꼬방 같은 집들!
허름하고 빈집 같은 그런 곳에서 이렇게 무더운 날에 어떻게 살고
생각이 스치듯 들었습니다.

고아원에 도착했습니다.
20여명의 어린아이들이 반겨 주는데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숙소는 근처의 조이 센터였습니다.
그곳은 넓은 예배실과 주방이 있고
그 옆으로 화장실과 샤워 실이 딸린 숙소가 있는데 이층 침대로
4명이 잘 수 있는 방이 여려 개가 있었습니다.
냉방이 너무 잘 되어 있고 잠자리도 너무 편했습니다.

학생들은 빈 창고 같은 예배실을 순식간에 바꿔 놓았습니다.
가져온 장식품으로 강단과 벽과 예배실 공간을 장식을 하는데
너무 아름답게 꾸민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의 무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 했습니다.
14명의 어린 학생들이지만 이들이 하나 같이 뭉치면
얼마든지 무슨 일 이 든지 할 수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를 편성하여 노방 전도를 나갔습니다.
선교사님이 보육원의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4개조를 편성하여 보육원의 아이들과 같아 나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무더위에 사람도 전혀 없는 길거리로 전도하려
나간다는 것이 그저 선교지에 왔기에 한번 하는 행사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육원의 어린아이들이 앞장서서 전도지를 갖고 나갔는데
가가호호(家家戶戶) 찾아가서 외쳐 댑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데 반가운 얼굴로 들어 줍니다.
전도지를 전해 주는데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내일 오전 9시에 오라고 하는데 웃으며 답합니다.

어쩌다 오는 택시를 손을 흔들어 세웁니다.
운전수가 차를 세워 줍니다.
전도지를 전해 줍니다. 웃으며 받아 주고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감동을 먹게 됩니다.
전도가 된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습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것에 대해 웃음으로 화답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무더워 등이 다 젖어 들고
숨은 콱콱 막히나 사람들의 서민적인 것과 순박함과
전도지를 받아 주는 것 자체가 제게는 60년대의 한국의 정서가
내 안에 살아 나와 마치 고향의 집에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포장도로인 자갈밭 같은 길을 걸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날 부모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모여 온 것입니다.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이 교회에 오기만 하면 돌아 갈 줄을 모르고
학생 선생님과 기타에 맞추어 찬양도 하고 배은 율동댄스도 하고
밖에 나와 물놀이도 하는 모습이 우리 어린 시절 하기 학교 때
교회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놀던 그 때의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선교사님의 말씀에 의하며 집에 가야 무더위 속에 빈집에 있기보다
이렇게 냉방이 잘 되어 있고 좋은 선생님과 목사님이 계시기에
교회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을 편집하여 선교사님과 그 곳 어린이들에게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돌아오는 길목
멕시칼리가 먼 나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잊혀진 고향과 어린 시절의 고향 예배당에
잠시 왔다가는 것 같았습니다.
두 아들은 돌아오면서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전문직을 가지고 와서
이들을 돕고 섬기고 싶다고도 하였습니다.

작은 선교 헌금이지만
사랑의 영적 헌화 헌금을 내어 주신 성도님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히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린 영혼들의 모습이 투영하게 보였습니다.
성도님들의 얼굴과 어린이들의 얼굴이 하나가 되어
밝은 모습으로 떠 올라왔습니다.
참 아름답고 그리운 얼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먼 나라 잃어버린 영혼이 있는 곳에 찾아와 땀과 눈물로 수고를 하시는 선교사님과
잠시 다녀가는 학생들의 해맑은 모습과
이렇게 작은 선교 헌금을 모와 전해 주는 그 손길들이 하나가 되어

어린 영혼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한다는 사실에 대해
얼마나 감격이 됐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자들의 손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며 훗날 주의 나라에 가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상 주신다는 소망이 얼마나
감사가 되는지 몸은 피곤하지만 영은 너무 맑았고 기쁨으로 출렁거렸습니다.